지금으로부터 9만여 년 전의 강력한 폭발, 지금의 백두산을 산답게 만들어준 빙하기가 끝나가는 무렵인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후기에 ‘흑요석(黑曜石)’이라 불리는 문제의 ‘보물’도 만들어졌다. 이 귀한 보물은 물물교환이라는 명목하에 한반도 전역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전국에 걸쳐 110군데에 달하는 곳에서 ‘Made in 백두산’이라 적힌 흑요석이 발견된다고 하니,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옛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황금을 만들어준다는 연금술의 도구, ‘현자의 돌’이 실재한다면 이와 같았을까? 돈을 만들어낸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흑요석은 연금술의 실사판으로 봐도 무방했다. 구석기 시대의 한반도에 살고 있던 호모사피엔스(지혜로운 자)들은 백두산이 선사한 보물을 알아보는 훌륭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르발루아 기법(Levallois technique)’이라 불리는 그들만의 노하우 덕에 ‘묠니르’에 버금가는 신비한 무기를 소유할 수 있었고, 천둥의 신 ‘토르’에 필적하는 인기와 권력도 누리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우리 역사 교과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호모사피엔스의 보물 흑요석」중에서
고구려의 절대자는 남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주위를 지키던 자손들과 신하들은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는 것도 잠시, 고인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무덤 내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작업의 마무리는 천연 석채(돌가루)들의 몫이었다.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믿고 따랐던 도교를 이용해 죽음의 길목을 지켜주기로 결심한 그들은 동쪽에는 푸른 빛깔의 청룡, 서쪽에는 하얀 빛깔의 백호, 남쪽에는 붉은 빛깔의 주작, 북쪽에는 진한 갈색 빛깔의 현무를 그려 넣었다. 청룡의 채색은 공작석이라 불리는 구리화합물(CuCO3· Cu(OH)2)이 맡았고, 백호의 채색은 연백이라는 납화합물(2PbCO3·Pb(OH)2)과 석회(CaCO3)가, 현무의 채색은 석간주라는 이름의 산화철(Fe2O3)이 담당했다. 붉은 주작의 채색만 남겨둔 고구려인들은 고민에 빠졌다. “붉은 빛깔은 무슨 재료를 쓰지? 석간주(Fe2O3)로 붉은 기운만 살짝 줄까? 아니야, 현무의 채색이랑 크게 다르지 않잖아. 그럼 납화합물 중에서 붉은 계열(Pb3O4)을 써볼까? 그것도 좋지만, 뭔가 좀 더 상징적인 게 없을까? 고인을 상징할 수 있는 재료 말이야. 아! 그게 있었지?” 그들은 불타는 주작에 걸맞은 채색 재료를 찾아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어두운 창고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오래전 건강에 좋지 않다고 판명된 시뻘건 진사(HgS) 가루가 있었다. ---「불사의 영약 진사」중에서
‘성덕대왕신종’의 음향에 귀를 기울였던 수많은 과학자들은 두 영역 대의 주파수를 이야기한다. 168~169Hz의 메인 영역과 64Hz의 보조 영역이다. 또한 메인 영역인 168~169Hz는 또 다시 두 가지 음파인 168.52Hz와 168.63Hz로 나뉜다고 한다. 그들은 이 숫자의 나열을 보면서 ‘마치 어린아이의 숨소리가 섞인 울음소리 같다’는 결론을 낸 뒤 자기들끼리 서로 대단하다며 박수까지 쳤다. 이를 과학자들만의 축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축제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횟수를 ‘시간 단위’로 변환해야 한다. 우선 메인 음파들부터 손을 보자. 168.52Hz와 168.63Hz 두 음파의 주파수 차이는 단 0.11Hz이다. 이를 뒤집어 시간 단위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1/0.11Hz=9.1초’ 이 두 음파는 9.1초가 지난 뒤 다시 만난다는 의미다. 물론 음파의 이동거리 자체는 다르지만 음파란 위/아래 진동이 반복되는 여러 사이클의 합이 아니던가? 빙글빙글 돌고 도는 시계 바늘을 떠올려보자. 작은 바늘은 한 바퀴 도는 데 12시간이 걸리는 반면, 긴 바늘은 한 바퀴 도는데 단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들이 원점에서 다시 만나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은 12시간이다. 마찬가지로 범종의 두 가지 메인 음파가 다시 원점에서 만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9.1초다! 즉 ‘9.1초’를 주기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 이를 음향 측정기로 확인해보면, 웅웅거리는 패턴은 9.1초를 한 주기로 나타나고, 이 주기는 또 다시 2.9초마다 들쑥날쑥 하는 새로운 패턴으로 나뉜다. 그런데 2.9초의 미세한 주기는 놀랍게도 일반인의 호흡 횟수(12~20회/1분=1회/3~5초)와 유사한 수치를 보였으며, 평상시보다 호흡이 빨리 이루어지는 우는 상황에서의 호흡 패턴과 매우 흡사했다. 따라서 한 번의 날숨으로 ‘으앙~’ 하고, 9.1초를 진행하는 와중에 2.9초마다 ‘꺽꺽’거리듯 호흡하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말도 안 되는 소문은 결국 음파들 간의 간섭, 즉 ‘맥놀이 현상’이 만들어낸 신기루였음이 밝혀졌다. ---「울려 퍼지는 유령의 목소리 성덕대왕신종」중에서
한편 ‘팔만대장경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받은 뜨거운 열기는 산기슭을 따라 올랐다. 그런데 장경판전에 들어서려는 찰나 수만에서 수십만이 넘을 것 같은 나뭇잎들과 떡 하니 마주쳤다. 그들은 콧구멍인 기공(氣孔)을 통해 ‘열을 못 먹어 안달이 난’ 수증기 분자들을 뿜어댔다. 이들의 잘못된 만남은 수십 수백의 나무 기둥이 만들어낸 복잡한 미로를 탈출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예상치 못한 수풀의 물 분자 공격 때문에 뜨거운 공기는 쓴맛을 보고 말았다. 병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공기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남은 열기를 한 데 끌어 모았고, 그 힘으로 간신히 특공대를 조직했다. 졸지에 조직의 미래를 떠맡게 된 열기 특공대는 남문인 ‘수다라장’으로 몰려갔다. 열기 특공대가 기세를 몰아 출입구로 향하던 바로 그때였다. 장경판전의 2차 방어선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방어선이란 바로 높이가 다른 두 개의 담벼락이었다. 첫 번째 벽을 가뿐히 넘어 들어온 그들은 이내 두 번째 벽과 마주쳤는데 둘 사이의 시간 간격은 불과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두 담벼락 사이에 갇힌 특공대는 길을 잃어버려 갈팡질팡했다. 이 혼돈스러움은 ‘와류(渦流, eddy)’라는 형태의 유체 흐름으로 나타났다. 어지러움에 고통스러워하던 그들에게는 이제 공격 명령 따위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또 다시 대부분의 병력을 잃어버린 그들! 남은 이들을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판이었다. (……) 치밀한 방어능력은 물론 논리력과 완벽한 준비성까지 갖춘 장경판전이었다. ---「수증기 군단을 물리쳐라 해인사 장경판전」중에서
3! 2! 1! 이제 끝났다. 지금 여러분이 만든 주전자 속의 물은 평소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임계점(374℃, 217.6기압)을 넘어섰고, ‘초임계 상태’라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 있다. 주전자 속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는 절대 체험해볼 수 없는 독특한 환경이 되었다. 이곳에서 물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적인 물’의 모습과 다른 아주 낯설고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액체 상태의 물과 기체 상태의 수증기가 동일한 밀도를 갖게 되는, 이른바 ‘믿기 힘든 상황’이 펼쳐지기에 물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알려진 ‘표면 장력(surface tension)’은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녘, 꽃잎 위에 동그란 이슬방울이 맺힐 수 있는 이유이자 잠수를 유독 싫어하는 소금쟁이들을 물 위로 두둥실 떠오르게 만드는 힘 말이다. 초임계의 세상에 떨어진 물방울은 현저히 낮아진 표면장력으로 인해 그 형태를 잃어버리고, 서로 뭉치지 않는 물 입자들은 이제 독립적인 존재들로서 각자 공중을 떠다니게 된다. 초임계 상태에 놓인 물은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이른바 천하무적이 되고 말았다. 종이를 만나도 적시지 않은 채 통과할 수 있으며, 세탁기 안에서 강력한 세제들과 격렬하게 춤 춰도 빠지지 않았던 얼룩을 쥐도 새도 모르게 단 한 방에 제거해버릴 수 있다. 어디 물뿐인가? 지구를 따뜻하게 덥혀준다는 온실가스의 대표주자인 ‘이산화탄소’마저 초임계 상태(31.1℃, 73.8기압)에 들어서면 커피 속에 잠들어 있는 카페인이라는 악당을 아무도 몰래 납치해올 수 있다. (……) 현재 대한민국은 이렇듯 초임계 상태로 거듭난 이산화탄소에게 ‘대한민국의 문화재 수호’라는 중요 임무를 맡겼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밀랍만 쏙쏙 빼내는’ 최적임자로 선택된 그는 지금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꿀벌과 이산화탄소 『조선왕조실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