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열흘이나 됐네.’
긴 한숨 뒤로 효진이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그 손아래 또 다른 감정이 자라나고 있다. 온전하게 분노의 씨앗이라 생각했는데, 그 반쪽은 채우지 못한 미련이요, 아쉬움이었다. 하얀 치맛자락을 물들이는 꽃물처럼 은밀하다.
시작은 분노였다. 그녀를 이곳으로 납치해온 우혁의 비열함. 오만한 표정으로 그 사실을 밝히는 당당함에 대한 분노.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거야. 어린아이처럼 손 안에 넣고 주무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효진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난생처음으로 밥상을 엎어버렸다.
와르르 쏟아지는 접시와 깨진 파편 사이로 어지러이 널려 있는 음식들. 스스로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터질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쥔 것도 잠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식사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에 더더욱 열이 올랐다.
그녀의 심장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들썩이는데, 아무 일 없는 듯 구는 우혁이 싫었다. 정이 떨어질 만큼 사납게 굴었지만, 여린 마음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첫 신경전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일까?’
변명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효진이 아는 우혁은 변명을 하느니 침묵을 택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혁은 아침 일찍 나가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그녀를 피하는 것인지, 그녀를 위해 피해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 효진은 혼자였다. 우혁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욕조 가득 채워준 물에 목욕을 했다.
기침이라도 하는 날에는 다음날 아침 머리맡에 달큰하게 꿀을 탄 뜨거운 우유 한 잔이 놓여 있다. 감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당황스럽다.
‘우렁각시 놀이라도 하자는 걸까?’
밖에서 들려오는 그의 움직임에 온몸의 촉각이 곤두서는 효진이었다. 눈치 없이 휴가를 방해한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드는 중이다.
‘한마디만 해봐. 얼굴을 그어줄 테니까.’
독기를 피우며 손톱을 세우는 것도 하루나 이틀이다. 효진은 점점 말 한마디, 눈빛 한 번 나누지 않는 그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지치고 피곤해졌다.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장에 있는 모든 이불을 효진에게 주고는 소파에서 담요 하나 달랑 말고 자는 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섬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효진은 잠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고운 모래가 빠져 나가듯 부드럽게 흐르는 그의 머리카락. 오랜 시간 잊어버렸던 그 감각이 너무나 친근해 효진은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아직도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음…… 효진아.”
잠에 취한 우혁의 숨결에 묻어난 자신의 이름이 효진의 심장을 흔든다.
‘이 사람 꿈속에는 내가 있는 것일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우혁에게 그녀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밖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거실의 추위에 우혁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효진……아.”
그는 울고 있었다. 슬픈 꿈을 꾸는 것일까? 한껏 웅크린 채 잠든 그의 모습이 지독하게 외로워 보인다.
“가……지마. 제……발. 효진아…….”
그의 목소리가 효진의 가슴으로 흘러내린다. 아프다. 정말 그의 가슴에 자신이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이리도 슬픈 목소리로 효진을 부르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날 밤, 효진은 밤을 꼬박 새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혁이 물을 끓여 욕조를 채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식사를 했다.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그의 정성이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종일 효진은 작은 서재에 들어가 재미없는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우혁의 움직임이 들려오자 효진은 부엌으로 나왔다.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며 같은 공간에서 다른 동선을 가지고 움직이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눈을 마주한 날이었다.
“언제까지 말 안 할 거예요?”
“아침 잘 먹었어?”
“네. 점심밥은 안 차려줘서 굶었어요.”
퉁명스러운 효진의 목소리에 우혁이 웃었다. 따뜻한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효진의 가슴으로 뜨끈한 통증이 인다.
“하루 종일 어디에 있다가 오는 거예요?”
“새 밥 주러.”
“아. 난 또 어디, 육지로 통하는 다리라도 놓으러 간 줄 알았지.”
“…….”
“새는 길러서 뭐하게요? 나처럼 가두어놓고 살 찌워서 잡아먹으려고요?”
“문 열려 있어. 가고 싶으면 어디로든 가. 육지까지 헤엄이라도 치든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갈까 했던 효진은 그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정말 배 안 오는 거예요?”
“응.”
“이렇게 얼굴도 안 쳐다볼 거면 왜 데려오라고 그랬어요?”
효진의 말에 우혁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두 개의 눈동자가 놀란 듯 그녀를 응시한다.
“나, 여기 왜 데려온 거예요?”
“…….”
“아침저녁으로 밥 해먹이려고 데려온 거예요?”
“보고 싶어서.”
“쳐다보지도 안잖아요.”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던가. 우혁이 물끄러미 효진의 표정을 살핀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집에 보내줘요.”
“안 되는 거 알잖아.”
퉁명스러운 우혁의 말에 효진이 뾰로통하게 대답한다.
“그럼, 심심하지 않게 놀아 주든가요.”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아니에요. 성질부리는 것도 지치고, 화 풀린 지 한 이틀 됐어요.”
“근데.”
“얼굴이라도 마주쳐야 화가 풀렸다고 내색이라도 하죠. 진짜 뭐하느라고 하루 종일 그렇게 나가 있는 거예요?”
“말했잖아. 새 모이 주러 간다고.”
“백설 공주도 아니고 새가 도망 안 가요?”
“아니, 너무 달려들어서 탈이야.”
도대체 무슨 새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 우혁이 동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경계심 많은 새들에게 어떻게 모이를 준다는 것인지 정말로 궁금했다.
“이젠 날아다니는 닭 같아. 여기 온 뒤로 내가 먹이를 많이 줬거든.”
“언제 왔는데요? 저랑 같이 온 것 아니었어요?”
“아니. 여기 온지 한 달 조금 안 된 것 같은데.”
날짜를 헤아리는 것조차 잊은 듯한 우혁의 모습에 효진이 놀라 물었다.
“회사 그렇게 오래 비워도 돼요?”
“칠 년 만에 갖는 첫 휴간데 뭐.”
“그동안 일만 했어요? 미국에 있었다면서요.”
저녁 식탁을 치우고 거실로 자리를 옮긴 우혁은 효진에게 그간 그가 지내온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도 견딜 만했어.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후후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지쳐 보여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힘들었던 걸까?’
냉랭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그 시간들이 그에게도 그녀만큼이나 힘들었나보다. 아련한 그녀의 시선에 우혁이 환하게 웃으며 섬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거든. 할 일도 없고. 그래서 낚시를 했는데, 물고기가 딱 걸린 거야.”
처음 낚았던 물고기를 구워 먹고 하루 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렸다는 소리에 효진은 다시 배를 움켜쥐고 웃어버렸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를 훌쩍 넘어 버렸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조는 아이처럼 효진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효진아.”
조용한 부름에 효진이 무거운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우혁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어가 자. 여기 추워.”
“흐음. 그러네요.”
효진은 너무 늦게까지 눈치 없이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닌지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빛 한 번, 말 한마디 섞지 않았는데 하루 사이 그의 다리를 베고 잠이 들다니.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인다. 게다가 들어가 자라 등 떠미는 그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추운데, 오빠는 잘도 자더만. 몸에 철갑을 둘렀나?”
“잘 잤는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곯아떨어지면 업어 가도 모르는 애가.”
“훗. 사돈 남 말 하시네. 내가 머리 만지는 것도 모르고 자더만.”
순간 귀신이라도 지나간 듯 싸늘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말장난을 하다 보니 잠든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것을 들켜버린 것이다. 민망해진 효진은 서둘러 방으로 도망쳐 오긴 했지만, 뜨거운 숨을 삼키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미워해야 했던 이유는 흐려지고 그 감정만이 남아 단단한 껍데기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열 배는 괴롭다.
‘나…… 이제 미워하는 것 그만하고 싶어요.’
원망과 미움이라는 감정 아래 숨죽이고 있던 그리움이 살며시 고개를 쳐든다. 효진은 애써 외면하려 했던 감정들을 마주해야 했다.
‘보고 싶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