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아쉬운 듯 교실 문을 나서자 아이들은 다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와르르 교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효진은 민정의 손을 잡아끌고 부모님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운동장은 꽃다발을 든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효진아!”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효진은 민정을 잡았던 손을 놓고 아버지에게로 뛰어갔다.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던 효진의 아버지가 딸을 덥석 품에 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효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대답했다. “차에.” “아빠! 내 단짝친구 민정이.” “그 예쁘고 공부 잘한다는 민정이?” 그간 딸아이 입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자랑이 넘쳐나던 그 친구가 궁금했던지 효진의 아버지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내 효진이 학생들 틈에 멀뚱히 서 있는 민정을 끌고 왔다. “반갑구나. 내가 효진이 아빠야.” 효진의 아버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민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민정아.” 싹싹한 성격의 민정이 아무런 대꾸도 없자 효진이 민정의 팔을 잡아 당겼다. “뭐해. 우리 아빠가 인사하잖아.” “아……. 안녕하세요.” 마지못해 꾸벅 인사를 한 민정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세상이 무너져도 ‘그랬니?’하며 딴전을 부릴 것 같은 민정이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효진이 웃음을 터트리며 친구의 등짝을 두들겼다. “뭐야! 아빠가 너무 잘생겨서 내 친구가 부끄럼 타나 보다.” “뭐? 헛. 허허허!” 뜬금없는 딸아이의 장난에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창피했는지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있던 민정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어! 맞다. 아빠, 나 민정이랑 사진 찍어줘.” 효진이 화들짝 손뼉을 치며 아버지의 팔에 매달렸다. “우리 아빠는 꽃이라고는 장미밖에 몰라.” 품안에 들었던 장미 꽃다발을 민정에게 덥석 안긴 효진이 있는 대로 폼을 잡으며 사진을 찍었다.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너희들 배 안 고파?” “잠깐만요.” 서너 장의 사진을 찍고 난 뒤 민정이 돌아서는 효진의 아버지를 붙잡았다. “아……저씨도 같이 찍어요. 네?” “그래! 아빠, 아빠도 같이 찍자.” 효진은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아 사진기를 건네고는 민정과 함께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섰다. 사진촬영을 끝낸 효진은 민정의 손을 잡고 운동장 한편에 세워놓은 차를 향해 걸어갔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효진은 민정의 손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섰다. “기분 별로 안 좋은가봐?” “왜?” “잘 먹지도 않고, 먹는 내내 말도 없고. 억지로 끌고 와서 화났어?” 민정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효진은 그런 친구가 조금은 섭섭했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재민 오빠 만나기로 했어?” “응.” “나도 이따 두 시에 잠실역에서 우혁 오빠 만나기로 했는데.” “놀이동산 가려나 보네. 나도 두 시에 잠실역에서 보기로 했거든.” 효진이 신이 난 듯 거울을 바라봤다. “정말 신기하지 않니? 난 네가 우혁 오빠 친구랑 사귀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세상 정말 좁다.” “그러게. 정말 좁네. 보고 싶지 않아도 꼭 마주쳐지는 사람이 있거든.” “뭐?” “아냐 아무것도.” 민정이 손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멀뚱하니 바라보던 효진은 이내 딴 생각에 빠져 들었다. 요즘엔 조금만 숨을 돌려도 수십 명의 우혁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다닌다. 우혁을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는 효진이었다. 그가 좋아서 죽을 것 같다. 아, 그 이름도 아름다운 사랑이어라! “있지, 나 우혁이 오빠가 너무 좋아.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 꼭 친오빠 같아.” “친오빠하고는 키스 안 하지.” 화들짝 놀란 효진이 손을 내저었다. “어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인데? 둘이 손잡고 떡볶이 먹는 사이?” “뭐야. 너랑 재민 오빠는 키스했어?” 뾰로통한 효진의 물음에 민정은 그저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 때문에 효진은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이미 계산을 마친 효진의 부모님은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 “응. 아빠. 민정이랑 놀이동산 가려고.” 어리광을 부리듯 입술을 모은 효진을 보며 아버지가 으름장을 놓으며 척하니 지갑을 꺼내들었다. “늦지 않게 들어와. 엄마 걱정해.” “알았어요.” 만 원권 열 장을 꺼내 딸아이 손에 쥐어준 효진의 아버지는 아내를 데려다주기 위해 차에 올랐다. “이따 저녁에 보자.” “네.” “아버지 참 다정하시다.” 민정의 말에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던 효진이 십만 원을 세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십만 원이나 주셨네. 헤헤헤.” “어머니는 어디 아프셔?” “아닌데?” 효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민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끊임없이 떠들고 있는 것은 효진 혼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