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영천인으로 한빈한 집안에 태어나 학문의 길을 걸으며 영남의 명문 학인의 집안인 병와 이형상의 가문에 가연을 맺었다. 병와의 11세 후손인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남편과의 인연이 어느새 30년이 훌쩍 넘었고, 두 아들도 눈 깜빡할 새에 다 컸다. 두 사람 모두 학문 연구와 사회 활동한다는 핑계로 가정교육에 소홀하지는 않은 것인지 노심초사했다. 특히 어미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을 하곤 했다. 그런데도 두 아들은 큰 탈 없이 다 큰 것 같아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곧 성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나이의 아들들, 또한 공직에 뜻을 둔 아들들을 생각하니, 수신(修身)의 범절이 왜 중요한지를 그리고 몸가짐을 바로하기 위해 수신의 경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이가 든 이 시점에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 고민에 빠진 즈음에 300여 년 전 이미 인간 수련의 길을 앞서서 훌륭히 갈고 닦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참으로 헌신했던 병와 이형상 선생의 수많은 저서들이 바로 내 곁, 우리집 서가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세상사 어떤 것은 신선함의 가치를 가진 것도 있으나, 오랜 시간 숙성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도 있음을 알 즈음의 나이가 되자 발견하게 된 글들은 보석같이 반짝거렸다.
조선조를 관통하는 걸출한 대학자였던 병와 선생이 남긴 책속의 글귀가 차츰 가까이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남의 눈에 자칫 가문의 자랑으로 여겨질까 두렵지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나와 같이 아이를 기르고 남편과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교육을 위해서,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국민을 위해 일하고자 공복(公僕)이 된, 또는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병와 선생의 글을 꼭 읽히고 싶었다.
사실 처음 이 책은, 내 아이들에게 선조의 위업을 알게 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게 하기 위한 소박한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행간 속에서 300여년 전의 병와의 올곧은 목소리가 처음에는 낮은 목소리로 들리다가 점점 큰 울림으로, 때로는 꾸짖음으로, 때로는 따사한 목소리로 나를 바로 세움을 느꼈다.
요사이처럼 공교육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을까. 가정교육 부재, 인성교육의 실종의 시대이다. 이전 시대에 나의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병와가 인성 교육과 가정교육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당쟁의 파랑 속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탐구했는지 우리 모두 한 번쯤 찾아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출판하려는 용기를 얻었다.
현실적 이유를 또 하나 더 든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자주 듣고 말하면서도 새삼스러운 이 명구. 요즈음 치국한답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신제가(修身齊家)하지 못한 불미스러움을 자주 목도함 때문이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거지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결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없다. 여기 병와 선생께서는 먼저 가정과 이웃을 바르게 이끌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그리고 힘없는 양민들을 위한 정치를 묵묵히 실천했던 목민관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병와 이형상(효종 4(1653)년∼영조 9(1733)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 또는 순옹(順翁)이다. 효령대군의 10세손이며, 성균진사를 지낸 이주하(李柱夏)와 파평윤씨 사이에 난 둘째 아들이다.
숙종 3(1677)년 사마시를 거쳐 16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에 나서면서부터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권력에 굽히지 않고 당화에 휩쓸린 조선조 후기 관료사회의 모순들을 혁신하려고 노력했다. 호조좌랑 재임 때는 동지사가 가지고 가는 세폐포(歲幣布)가 병자호란 이후 바쳐온 보포(報布)보다 9척이나 긴 것을 알고, 이것이 이후 무궁한 폐단이 될 것을 우려하여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늘어난 척수를 끊어버리고 보내었다.
성주목사로 재직시에는 민풍 교화에 힘써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하여 관비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인조 때 의사 이사룡(李士龍)을 위하여 충렬사를 지어 그의 사적을 길이 남겼다. 한편 독용산성(禿用山城)이 파괴된 채 방치됨을 보고 민정(民丁)을 차출하여 3일 만에 완성시켰다.
동래부사 때에는 이 지역이 일본과 접경된 관문으로서 국방상 요지임을 절감하고 수비에 더욱 힘쓰는 한편, 당시 일본의 구송사(九送使)가 많은 폐단을 일으킴을 통감하여 이를 폐지시키려 노력하였다.
경주부윤 때에는 운주산(雲住山)의 토적 수천 명을 해산시켰으며, 향교와 서원에 교유하여 학풍을 진작시키고 향약과 향음주례를 강화하여 향촌 질서를 세우고 충·효·열을 민간에 장려하여 유교적 도덕정치를 실시하였다.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