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시험이 끝나고 모두 떠난 그 텅 빈 교실에 소미와 승호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미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굳게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었고, 승호는 여전히 빈 칠판만을 쳐다보았다. 승호가 수능을 보지 않았다는 걸 소미는 며칠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수능 보고 같이 할 것들을 계획까지 세워놨는데 터무니없는 승호의 유학이 툭 튀어나와 소미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화가 쌓인 소미는 터질 듯 치미는 뜨거운 열에 살갗이 다 아릴 지경이었다. “미안해.” 오랜 침묵을 깬 승호의 한마디에 소미는 부르르 떨었다. 그 어떤 말보다 이 자체를 인정해 버리는 승호의 말이 소미는 너무나 싫었다. “나쁜 자식! 미국이 옆집이야? 지금까지 왜 말하지 않았어?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야 간다고 하는 거야!” “일이 그렇게 됐어.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너 나 좋아한다면서 대학 가면 같이 여행 가자고 한 거 다 거짓이었어? 대학은 꼭 여대로 가야 한다고 그런 거 거짓말이야? 너 나 가지고 놀았니? 내가 너 좋아하니까 너 미국 가기 전에 심심하니까 나 데리고 논 거야? 날 그렇게 만만하게 본 거야?” 승호는 차근차근 다 얘기하려 했지만 막상 맞닥뜨리자 소미보다 더 엉클어져 버렸다. 항상 이런 날을 예상했지만 막상 부딪치니 생방송 앞의 당황스러움만 남았다. “……미국 가면 언제 와?” 소미는 혼자 씩씩대다가 어느새 못 가게 만들지 못하면 기약이라도 받아놓고 싶었다. 당장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볼지도 모르지만 꼭 언제든 다시 와 같이 하기로 했던 것들을 다시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었다. “적어도 8년.” “미국 대학도 방학은 있을 거 아냐? 아니면 설날이나 추석, 하여간 노는 날은 있을 거 아냐!” “내가 여기를 떠나는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내가 여기서 그 사람들한테 맞설 수 없어서, 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잖아. 내가 다시 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은 내가 적어도 그 사람들과 맞설 힘을 가진 그때야. 그래서 나도 어차피 살아야 할 여기서 숨 쉬고 살고 싶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공부만 하러 가는 게 아냐. 내 나름대로 그 사람들한테 복수를 해주고 싶어서 그래. 절대 내게 오지 않을 것을 얻어내고 싶어서. 그걸 가지려면 우선은 가야 해. 가서 내 능력을 키워야 해.” “그럼 나는? 나랑 있어도 너 숨 쉬잖아. 지금도 쉬고 있잖아! 숨 안 쉬면 죽는데 너 안 죽고 나랑 지금 있잖아!” “소미야, 숨은 폐로만 쉬는 게 아냐. 여기 안에 차고 들어 있는 마음으로도 쉬는 거야. 난 완전히 숨 쉬고 싶어. 어느 한쪽이 막혀 헉헉거리며 괴로운 거 싫어. 그래서 가.” “그 사람들이 누군데?” “있어. 그 사람들.” 소미는 모든 게 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아픈 승호를 모르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여지도 없이 떠난다니 소미는 서러움을 넘어 슬픔이 밀려왔다. “그럼 이제 너 못 보는 거야? 너랑 하기로 했던 것들 다 다른 남자애들이랑 해도 상관없는 거야? 다른 남자애들한테 아빠 냄새 같은 거 맡아도 상관없는 거야? 나는 네가 참 좋았는데, 너랑 하고 싶은 거 진짜 많았는데……. 지금 당장은 너와 같이 못 하는 거, 나 기다리면 안 돼? 다 잊어버려야 하는 거야?” 소미는 슬픔이란 파도가 잔뜩 밀려와 속절없이 뒤집어쓴 듯 눈물이 펑펑 흘렀다. “소미야, 같이 못하는 거 나중에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잖아. 그러니 기다리지 마.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그렇게 열심히 지금처럼 지내. 나중에 후회하지 않? 다 하면서 지내. 나중이란 생각 하지 말고 다 해. 그리고 아주아주 많이 시간이 지나 내가 돌아오게 되면…….” 승호는 욕심이 먼저 앞선 말이 나가려던 걸 삼켰다. 함께하지 못하는 그 시간의 끝에 찾아가겠다는 말이 너무나 이기적이라 승호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끝나는 인연일 수밖에 없다면 헛된 말로 소미에게 더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서럽게 입술을 덜덜 떨어가며 울고 있는 소미에게 승호는 기약도 못하는 이별을 전하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누군가 메스를 들고 마구잡이로 가슴을 찢어발기는 것같이 아팠다. 친어머니를 보내고 그 영혼이 짓밟히는 자리에서도 잘 버틴 마음이 너무도 아파 승호는 너무 괴로웠다. “정말 안 와? 나 안 보고 싶어할 거야?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나 다른 사람이 아닌 너랑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이제 누구랑 해? 차라리 그냥 내가 말 걸어도 네가 막 무시했으면 나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잖아.” 승호는 목 놓아 울어버리는 소미에게 다가가 품에 안았다. 가슴에 안겨 들썩거리는 소미를 보는 승호는 한없이 미안했다. 애초에 시간을 되돌려 ‘그때 무시했더라면……’ 이란 생각조차 변명이 될 뿐 어느 것도 울고 있는 소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승호는 당장 그리워하고 보고 싶겠지만……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가슴으로 숨 쉬는 날, 그들에게 얻어내 손에 쥔 날, 친어머니가 원했던 그 순간, 꼭 다시 만나면 된다고 아픈 마음을 달랬다.
고등학교 시절은 눈물로 범벅된 한 장의 사진으로 변했다. 아릿하게 웃음이 나오면서도 눈물 맺히게 하는 그런 시간을 기억하면서 승호는 한국을 떠났다. 그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남은 미련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