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부터 PC통신에 심취하다 딴지일보와 진중권을 알게 됐고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원이 됐다. 이후 진보누리라는 인터넷 토론 사이트의 운영위원을 하며 인터넷 셀러브리티들과 친구가 됐고 2006년에 덤프연대에 취직해 본격적인 운동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진보신당 기획실 국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취미로 동네 친구들을 모아 <야채인간>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야채라디오>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하기도 한다.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트위터는 주체화의 과정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향해 끊임없는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적이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내화한 주체이기도 하다. 타자의 결여에 자신의 욕망을 일치시키는 히스테리적 주체야말로 복제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주관적인 것’을 변화시키는 주체이다. 강박적 주체와 달리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인의 욕망에 관심을 보인다. 이 관심은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라기보다 타인에게 헌신할 수 있는 핑계 자체를 갈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p.28
트위터에서 보이는 현실, 즉 타임라인은 사실 자기 자신이 편집한 현실이다.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팔로우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세계 그 자체인 것처럼 또는 세계의 축소판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소셜 미디어는 세계를 좀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존경의 안경’이 되기 어렵다. 내 타임라인에 올라온 이야기들은 물론 의미 있고 소중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세계의 파편’일 따름이다. 이제 소셜 미디어의 내면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바로 ‘히스테리아 파라노이아’다. ---p.48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개념을 보면 마치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어떤 공적 활동에 적합한 솔루션이 트위터이고, 개인적 교분을 나누고 사적 활동의 통로로서 활용하기 적합한 솔루션이 페이스북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서비스들의 차이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적 활동의 통로로서 트위터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페이스북이 내세우고 있는 ‘소셜 네트워킹’의 필요성에는 동감하면서도 인터넷의 익명성이라는 가치를 부정하는 방향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페이스북을 공적 활동의 기반으로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pp.85-86
140자. 이런 알 듯 모를 듯한 글자 수가 채택된 이유는 트위터가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트위터 본사의 의하면, 160자는 미국에서 핸드폰으로 한 번에 전송할 수 있는 텍스트 메시지의 글자 수다. 그중에서 20자는 사용자의 이름을 표시하기 의해 빼고, 나머지 140자가 사용자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이 140자 속에는 부연 설명과 우회로와 변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덕분에 트위터는 사용자의 ‘의식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기가 쉽다. 물론 일반인 의식의 흐름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확률은 높지 않다. 그런데 그가 만약에 우명한 사람이라면? 곧바로 멘션 통에는 불이 붙고, 수백에서 수천 번 심하면 수만 번의 리트윗이 반복되다가 다음 날 아침에는 그 트윗을 주제로 한 수많은 신문 기사들을 접하게 될 터다.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트위터를 시작한 유명인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pp.92-93
트위터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영웅 테세우스는 페리테스를 격퇴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쇠망치를 들고 다니며 악한들을 징벌했다. 프로크루테스는 ‘늘이는 자’라는 의미로, 그는 여행자들을 자신의 집에 끌어들여 쇠로 만든 침대에 강제로 눕히고 키가 침대보다 짧은 경우에는 늘여서 죽였고 튀어나올 경우에는 잘라서 죽였다. 이처럼 트위터는 자신만의 아집이 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폭풍 알티를 통해서 분노의 봉화를 피우고 지지자들을 멘션과 DM으로 포섭하면 충분히 이슈를 만들 수 있다. 이때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