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님, 삼겹살 2인분이랑 된장찌개 주세요. 공깃밥이랑 계란찜도 하나씩 부탁드려요.”
참숯직화구이삼겹살 전문점을 찾아간 윤슬이 경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다. 아무리 다이어트가 걱정되더라도 음식을 앞에 두고 궁상을 떠는 것은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윤슬은 잠시 다이어트를 잊고, 간만에 기분 좋은 식사를 했다. 삼겹살은 두툼하니 육질이 살아있고, 밥은 고슬고슬했다. 된장찌개는 구수하고, 계란찜은 폭신폭신했다. 음식도 맛있고 서비스도 나쁘지 않았다.
아침에 혼자 찾아온 돈 안 되는 고객에게도 식당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맛은 별 다섯 개, 서비스는 별 네 개 반! 참숯직화구이삼겹살을 맛집 프로그램에 내보내기로 윤슬이 마음먹은 찰나였다.
맛있게 삼겹살의 정수를 즐기고 있는 윤슬의 곁에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윤슬 씨 아니야?”
먹다가 체할 뻔 했다.
“컥!”
마늘 3쪽에 쌈장까지 듬뿍 넣은 쌈이었다. 크게 입을 벌리고 상추쌈을 입안에 밀어 넣는데 조막만한 얼굴에 눈, 코, 입 다 들어간 인형 같은 얼굴이 불쑥 그녀의 눈앞에 등장했다.
“어머, 윤슬 씨 천천히 먹어. 천천히. 놀랐나 보다.”
여자는 가녀린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요 앞에 지나는데 윤슬 씨가 보이더라고.”
여자는 해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서둘러 쌈을 삼킨 윤슬은 그녀의 말간 웃음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정말로 반갑네. 우리 오랜만이지?”
예현은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윤슬에게 손수 물을 따라 건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아름다운 아가씨는 보이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그나저나 윤슬 씨는 여전하다.”
여덟팔자로 눈썹을 일그러뜨린 예현이 어색한 듯 오른손으로 귓가를 만지면서 말했다.
“윤슬 씨 위는 참 대단한 거 같아. 아침부터 삼겹살이라니. 나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야, 정말. 자기 위는 참 건강해서 좋겠다. 그렇지?”
분명히 비꼬는 말툰데, 예현 특유의 생각 없음과 개념 없음을 감안하면 비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순수한 감탄처럼도 들렸다.
책상다리를 하고 편하게 앉아있던 윤슬이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면서 예현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지만 예의상 말을 건넸다.
“혹시 식사는 하셨어요? 같이 드실래요?”
“아니. 난 아침부터 삼겹살 같은 거 못 먹어요. 느끼해서 그걸 어떻게 먹어? 그리고 난 아까 브런치를 먹고 와서 괜찮아요. 윤슬 씨 많이 먹어요.”
사양하며 생긋 웃는 예현의 미소가 상큼했다. 그리고 윤슬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브렉퍼스트(breakfast, 아침)와 런치(lunch, 점심)의 합성어인 브런치나 한국어로 아침 겸 점심의 합성어인 아점이나 그게 그거지 뭘 그리 구분을 하는 것인데? 그걸 영어로 말하면 좀 유식해 보이나?
베이컨에 스크램블 에그, 빵, 커피 등을 몇 만원 들여서 먹는 브런치랑 내가 먹는 삼겹살이랑 뭐가 다른데? 베이컨이 삼겹살이고, 스크램블 에그가 계란찜, 빵은 밥인데 도대체 뭐가 다르니? 브런치라고 하면 뭐가 있어 보여?
윤슬이 예현 모르게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대놓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으며 윤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어디 가는 중 아니었어요?”
“윤슬 씨는 내가 빨리 갔으면 좋겠어?”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어디 가시는 중인 것 같아서요.”
“굳이 그런 건 아니야.”
말을 주거니 받거니, 불편한 동석을 표방하던 윤슬은 이제 예현에게 신경 쓰지 않고 눈치를 보면서 고기도 한두 점 주워 먹었다.
“맛있어요?”
“예. 이 집 고기 괜찮아요.”
“음, 그러네? 괜찮은 것 같다.”
새침데기처럼 이런 것은 못 먹어요, 하던 예현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윤슬 옆에서 고기 한두 점을 주워 먹었다. 어느새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 남자는 멀거니 서서 두 여자의 만담을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예현아.”
남자가 헛기침을 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이만 가자는 뜻으로 예현을 불렀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깨달은 듯 나직한 탄성을 뱉어낸 예현이 남자의 팔을 힘주어 움켜잡고 가까이 이끌며 입을 열었다.
“맞다. 소개가 늦었네? 윤슬 씨는 누군지 알지? 서강준. 이번에 우리 드라마 남자 주인공.”
예현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남자의 존재를 눈치 챈 윤슬의 얼굴에 감탄이 스쳤다. 예현에 집중하느라고, 그녀 옆의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날카로우면서도 단정한 계란형의 얼굴과 부리부리한 두 눈, 오뚝한 콧날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꽉 다문 입매는 세련됐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독특한 매력을 자아냈다. 마치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추는 것 같은 황홀한 미모였다. 윤슬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강준의 얼굴을 응시했다.
서강준이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국보급 미남과 향단이 전문 배우 사이에 접점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서강준이라는 배우는 유난히도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하는 배우였다. 대중은 물론이고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근데 신비주의 콘셉트에는 이유가 있었나 보다.
“강준 오빠, 이쪽은…….”
“예현아, 내가 지금 바쁘거든?”
성격이 나쁘다.
낮게 한숨을 내쉰 남자는 윤슬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예현의 말을 끊었다. 생각 없고 개념 없기로 유명한 예현조차 초면인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서로를 소개시켜줘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저쪽은 한술 더 뜬다. 역시 끼리끼리 노나 보다.
“계속 여기서 시간 끌 생각이야? 내 기억만으로도 벌써 스무 번이 넘어. 이 우연인 척 하는 만남에 나는 또 시간을 낭비해야 하나?”
차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윤슬은 할 말을 잃었다. 예현도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윤슬 씨는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운데…….”
“내가 굳이 소개받아야 하는 사람이야?”
잠시 주저한 예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슬은 자존심이 상했다. 정말로 끼리끼리 논다 싶었다. 강준이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예현이 그에게 뭔가 실수를 하기는 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강준이 윤슬에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강준이 속이 상했다. 소개할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부정하는 예현도 미웠다. 하지만 가장 밉고 속상한 것은 배우 취급 받지도 못하는 현재의 자신이었다.
윤슬은 정말로 자존심이 상했다. 온몸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이 싸한 느낌이 감돌았다. 그들과 헤어지고도 한동안 체기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할 정도로 윤슬은 마음이 상했다. 배우로서의 자존감마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제작발표회에서 바퀴벌레 한 쌍은 윤슬의 여린 가슴에 제대로 대못을 박았다.
“아, 아침에 삼겹살을 먹었던 분?”
윤슬의 인터뷰 차례에 그녀를 알아본 강준이 나직이 중얼거렸고, 그의 목소리는 바로 기자에게 포착되었다.
며칠 전에 예현과 함께 감독님과의 미팅에 가던 중에 삼겹살집에서 아침부터 밥을 먹고 있는 윤슬을 보았다며 강준을 입을 열었고, 예현이 부연설명을 붙였다.
“사실 깜짝 놀랐어요. 그 아침에 어떻게 삼겹살을 먹을 수가 있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 가거든요. 게다가 윤슬 씨 정말 너무 잘 먹어서. 호호호. 고기에다가 밥까지 추가해서 드시고 있더라고요. 윤슬 씨의 건강함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어요.”
그렇게 윤슬은 아침부터 삼겹살을 먹는 튼실한 향단이가 되었다. 맛집 프로그램의 리포터로서 사전조사를 위해서 찾아간 것이라고 변명을 했지만, 윤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기사가 떴다. 인기 없는 조연배우라 스포츠 신문 1면에 나는 영광은 얻을 수 없었으나 적지 않은 기사가 양산되었고, 그 기사에는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아침부터 그렇게 먹으니까 살이 찌지 않느냐는 악성댓글부터 시작해서 임산부에게 살쪘다는 말 하면 안 된다는 어느 지능성 안티의 댓글, 그러니까 춘향이가 아니라 향단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댓글도 달렸다. 덕분에 브라운관 데뷔 3년 만에 별명도 생겼다.
삼겹단! 삼겹살을 먹는 향단이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서문윤슬은 「춘향, 두 번째 이야기」에서 데뷔 3년 만에 삼겹단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리고 아침부터 삼겹살 먹는 팔자 좋은 향단이는 성춘향 강예현과 이몽룡 서강준에게 한을 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