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다름 아닌 여행지에서의 만남이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물론 통성명 정도는 하지만 세세히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까지 모든 여행지에서 혼자 여행 온 한국 여자들을 참 많이 만났다. 대부분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우리 또래였다. 그녀들은 직장을 그만두었거나, 잠시 휴직중이거나, 좀 더 나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공통된 주제는 연애와 결혼,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밥벌이’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사리 취업을 했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길이 내 길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게 되는 나이, 현재 만나는 사람이 나의 평생 동반자가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물어보게 되는 나이, 30대.
--- 「위로의 다른 이름, ‘공감’」 중에서
할 일 없음이 이곳에서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 이 시공간 속에서만큼 나는 그냥 나였다. 아이템에 시달리는 나도 아니었고, 섭외전화에 전전긍긍하는 나도 아니었으며, 화낼 곳이 없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버럭 소리를 지르던 나도 아니었다.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절대적으로 행복한 나였다.
영화 [천국의 속삭임]에는 시력을 잃고 절망하는 아이가 나온다. 빛깔이란 게 어떤 건지 너무 궁금했던 아이는 다른 아이에게 물었다. “친구야, 파란색은 어떤 느낌이야?” “어...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네 얼굴을 스치는 바람. 그런 바람과 같은 느낌이야.”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마주한 스쳐가는 파란 바람이, 에게해 위를 천천히 지나간다. 파랑을 닮은 바람은 이곳이 천국이라고 속삭였다. 나무늘보처럼 바다에 기대어 꿈을 꾸었다. 영영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꿈을 꾸었다.
--- 「시간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순간」 중에서
눈 내린 온천마을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러브스토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주요 배경은 일본의 전통 숙박시설인 료칸이다. 이 책을 읽은 후 료칸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작가가 그려
낸 료칸의 이미지가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롭게 다가왔다. (중략)
도착한 순간부터 배어 나오는 고택의 향기에, 내 코끝은 료칸의 운치를 알아차렸다. 기대했던 대로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다. 고즈넉한 다다미방에 머무르며, 계곡이 흐르는 정자에 앉아 잘 차려진 정식을 먹고, 게이샤 공연을 관람하고, 달빛을 받으며 온천을 하는 일련의 상황들은 21세기가 아닌 에도시대의 어느 중간 즈음에 머무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사소한 나날들의 행복이란」 중에서
자전거를 타고 블루라군으로 향하는 길은 말 그대로 자연 그 자체였다. 비가 내린 뒤 더 짙은 푸름을 입은 나무,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 위를 마찬가지로 천천히 지나가는 사공들, 눈 흰자위가 하얗디하얀 순수한 아이들, 블루라군으로 향하는 그 길은 그야말로 시원한 블루였다.
가끔 출근길에 차가 거의 없고 앞으로 펼쳐진 도로 위의 신호등이 죄다 초록색일 때,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세상이 나를 향해 열려 있다는 느낌, 나무의 나이테처럼 마디가 확장되는 느낌. 지금이 그랬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그 순간만큼은 내 가슴이 시리도록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 「시간을 천천히 추억의 속도로 늘려 보자, 블루라군」 중에서
주변의 온도를 올려 주는 음식들이 있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군고구마 냄새, 학교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어머니가 만들고 계신 김치찌개, 이른 아침 1층 빵집에서 풍겨 오는 빵 굽는 냄새…. 이런 것들은 주변 온도를 3도 정도는 올려 주는 것 같다. 라오스 시장 한 모퉁이에서 맛 본 쌀국수도 그랬다. 우기로 인한 각종 사고와 미나의 아픔으로 인한 걱정, 과연 한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의 온도를 3도 정도 올려 주었다.
--- 「마음의 온기를 3도 올려 준 라오스 쌀국수」 중에서
내게 ‘낭만’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풍경으로 묘사하라고 한다면, ‘니하운 운하’를 그릴 것이다. 지금껏 내가 꿈꿔 왔던 낭만과 가장 비슷한 옷을 입은 장소였다. 따뜻한 만남을 부추기는 차가운 공기, 정박하거나 혹은 떠나가는 배들, 각자 다른 색깔이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집들, 고독함을 입었으나 설렘을 신고 추운 공기 속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이런 대비야말로 낭만을 극대화해 주는 재료들이었다. 혹시 내게도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히 낭만적인 도시, 코펜하겐의 첫인상이었다.
--- 「낭만의 배경은 코펜하겐 니하운」 중에서
그곳엔 젊은 남녀가 살고 있었다. 연인은 조금 이른 저녁이면 끊임없이 서로를 탐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 맞은편 건물의 이야기다. 덴마크에 있는 동안 코펜하겐 시내의 작은 아파트를 빌려 지냈는데 주변 건물 전체가 도로 쪽으로 창이 나 있어서 바로 앞집의 실내가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려고 하는데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는 정사. 저렇게 적나라하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육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 「창문 너머 그대들은 지금도 뜨거운가요?」 중에서
여행을 하다 보면 웅장한 건축물이나 거대한 대자연에 감탄할 때도 있지만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마음이 동할 때가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의 학교라든지 풀을 뜯고 있는 염소 한 마리까지. 평소라면 흘려버렸을 평범한 삶의 모습들이 더 크고 명확하게 가슴에 와 닿는 지점이 있다.
핀란드 투르쿠가 그랬다. 예상보다 핀란드에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흔히 잘 알려진 헬싱키, 디자인 천국이 아닌 핀란드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찾아갔던 투르쿠. 우리는 발이 푹푹 잠기는 눈밭을 걷고 걸어 이곳의 명소 투르쿠 성에 도착했다.
--- 「눈 내리는 날 숲가에 멈춰 서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