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때를 노리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를 꺼내기 가장 적당한 때, 그가 놀라는 모습을 보여도 무안해하지 않을 정도의 시기가 언제일까를 가늠하며 석경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천천히 홀짝였다.
“무슨 고민 있어?”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이상했는지 그가 다정하게 물어 왔다. 하긴 단 1분도 쉬지 않고 재잘재잘 잘도 지껄여 대던 애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궁금하고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 판국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잔잔한 수면 위에 난데없이 던져진 돌멩이가 만들어낸 파문처럼 그녀의 가슴은 끝 간 데 없이 일렁이고 있는 중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그는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음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자나 깨나 오매불망하는 사람인데 뭔들 예쁘지 않겠냐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석경이 그에게 홀랑 빠져 있기 때문에 하는 말만은 아니다.
언젠가 무슨 얘기 끝에 그녀의 어머니도 그의 목소리를 일컬어 ‘여자 여럿 잡을 목소리’라고 하신 적이 있다. 물론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엄마의 말씀이 온전한 칭찬만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어쨌든 요모조모로 까탈스러운 엄마의 마음에도 쏙 들 만큼 그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내내 규혁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던 눈이 이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아, 저 목소리에 사랑이 담겨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여동생에게 보내는 듯한 밝은 미소 대신, 열정이 담겼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향해 던지는 더운 열정과 끈끈한 격정이 담겨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석경, 윤석경. 인마! 왜 그래.”
‘인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몽상에 빠져 반쯤 감겨 있던 눈이 확 뜨였다. 머릿속에서 한창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던 열띤 눈빛과 단단한 가슴팍에 대한 환상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못내 아쉬운 마음에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냈지만 눈치가 느리기 그지없는 남자라는 종족 중에서도 더군다나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둔한 사람이니.
“설마 벌써 취한 건 아닐 테고, 잠 오니? 어젯밤에 못 잤어?”
백일몽에 빠져 있는 모양새가 자는 걸로 비쳤다니.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다. 휴우.
연신 물어도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는 게 조금 어색했는지 그가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드디어 노리던 기회가 왔다! 석경의 눈이 반짝 빛났다. 차가운 잔이 그의 입술에 닿고 거품 섞인 호박색의 액체가 모양 좋은 입술 새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며 내내 준비하고 있던 한 마디를 던졌다.
“우리 결혼해.”
푸흡!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저 얼굴이 좋아도 이렇게나 코앞에 바짝 다가앉지는 않는 건데 그랬다. 손을 들어 얼굴로 날아든 미지근한 액체 방울들을 닦아내며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그의 물음이 들렸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무슨 말을 들었는데?”
“……아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하는 반문에 서둘러 도리질을 하며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저 남자, 이렇듯 둔한 것도 예쁘게만 보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끔은 난감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다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규혁은 입을 향해 다가가던 술잔의 방향을 얼른 바꿔 테이블 위에 놓았다.
“맞게 들은 거야.”
아, 하고 싶은 말을 꺼내고 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후련하다. 하긴 십 년이 넘은 체증이니 후련한 것도 당연하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석경이 히죽거리는 사이 건너편의 그는 쌍꺼풀 없는 우묵한 눈을 세모꼴로 만들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상식을 벗어나면 실례라는 걸 모르니?”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몰라도 그녀는 스스로가 꽤 객관적인 눈을 가진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또한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아주 바람직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자신하곤 했다.
즉, 비록 13년이라는 지난 세월 동안 박규혁이라는 남자에게 풍덩 빠져 허우적대고 있기는 하지만, 방금 그가 한 말이 무척이나 고리타분한 나무람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는 된다는 말이다. 여느 남자라면 생각지도 못한 상대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대개는 당황해서 우물쭈물하거나 아니면 속내를 궁금해 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저 점잖은 말로 타이르려는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농담 아닌데.”
“그만하자.”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말을 딱 끊으면서도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는 것을 보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쯤 해서 잠깐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지. 뭐, 어차피 같은 곳으로 귀결이 되겠지만 말이다.
“오빠는 아예 무관심한 거랑 친근하게 굴면서도 정작 속정은 안 주는 거,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
기다란 속눈썹을 파닥거리며 묻는 말에 질문의 의도가 무언지 가늠해 보는 듯 그의 눈썹이 평행을 그렸다.
“어떤 대답을 듣길 원하는데?”
“내가 원하는 말이라면 다 해줄 수 있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나쁜 버릇이야.”
“오빠가 먼저 시작했잖아.”
끈질긴 그녀의 질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양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해봐. 어느 쪽이 인간적으로 질이 나쁜 거야?”
“글쎄.”
망설이며 뜸을 들이는 품이 뭔가 힌트를 얻으려는 것 같았다.
“사지선다형도 아니고 정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솔직한 오빠 생각을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런 걸 갖고 인간적인 질까지 운운해가며 따지는 건 좀 그렇지 않니? 그냥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겠지. 일 때문에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겉포장을 꾸미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거고, 반대로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이 겉으로만 실실거리고 정을 안 주면 속으로 선을 긋는다는 거지.”
“그럼 오빠는 나한테 선을 긋고 있는 거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벅이고 있는 그를 향해 석경은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여동생처럼 챙겨 주고 아껴 주지만 속으로는 쟤는 절대 안 돼, 이러잖아.”
“안 되다니.”
“결혼 말이야. 나랑 결혼하는 거 전혀 생각도 안 해봤지?”
결국은 결혼으로 이야기가 되돌아왔다. 끈질기게 결혼을 앞세우는 말에 그가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인마, 동생하고 결혼하는 골 빈 녀석이 어디 있다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술 고프다고 일주일을 징징대기에 기껏 어렵게 시간 냈더니 대체 왜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이런 식으로 넘어갈 줄 알았다고.”
투덜투덜투덜. 그럼 그렇지. 어차피 이런 식으로 대화가 마무리 될 줄 알았으면서도 입이 썼다. 젠장! 맥주는 왜 이리 미지근한 거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