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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수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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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1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16g | 148*210*14mm
ISBN13 9791189171223
ISBN10 11891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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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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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이게 뭐야?”
사립짝문을 들어와 무심코 현관으로 향하던 나는 테라스의 자동 센서 등이 켜지는 순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뾰족한 주둥이에 커다란 두 귀가 쫑긋하고 동그란 눈망울이 영롱한.
마을 곳곳에 준동하는 고양이는 아니었다. 저번에 거실 앞 테라스 아래서 기어 나와 비척비척 산길 쪽으로 사라지던 늙은 너구리, 이웃들이 그 녀석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새벽에 마당에 잘못 들어와서는 어쩔 줄 모르고 겅중겅중 뛰던 새끼 고라니도 아니었다.
멈춘 걸음을 한 발 물리면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니 영락없는 여우다. 털빛이 눈부시게 흰 눈여우. 그렇게 녀석은 그림같이 앉아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순간, 어릴 때 할머니가 들려주셨던 옛날얘기 속의 꼬리 아홉 달린 ‘백여시’가 떠오르면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 p. 9

나는 녀석과 함께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유기견이란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목줄을 풀까 말까 망설이다가 풀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녀석이 달아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비록 마을 방송으로 녀석의 외모와 품종, 성품, 우리 집에 들어온 일시 등을 알리며 주인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전하지는 못했지만 이장 댁을 방문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이 들고 나면서 강아지를 버리고 가기도 한다는 것, 심지어 다른 마을에서 여기에 갖다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 TV 방송에서나 듣던 이런 서글픈 일이 내 주위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으며 베일에 싸인 이 강아지의 정체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장이 지구대와 유기견 보호소를 말해준 것은 내가 건강을 회복하러 조용히 ‘요양차’ 내려왔다는 이웃들의 얘기를 듣고 마지막 방법으로 제시한 배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p. 24~25

내가 벤츠 아저씨라고 부르게 된 이 아저씨는 앞뒤 사정을 가차 없이 잘라내고 핵심만 툭, 휙 하고 던지는 극단적인 비약 어법을 구사했다. 인사말, 감사, 사양, 미안 같은 말은 그의 매너사전에 없는 듯했다. 용건만 담은 극히 짧은 발화는 ‘뭐지?’ 하고 얼른 추슬러봐야 뜻을 알 수 있었지만 대단한 의미가 담긴 적은 거의 없었다. 간단명료해서 도리어 신선한 맛이 있었고 퀴즈를 풀듯 추리를 요하기 때문에 긴장감도 유발했다.
벤츠 아저씨는 이 집을 팔고 아랫마을 연립주택으로 이사 가 살고 있었다. 차를 몰고 있는 그와 마주쳐서 인사를 건네면 빙긋 웃는 법조차 없이 차창을 조금 내리는 것이 다고, 밭에서 내려오는 길에 비닐봉지 하나를 내게 툭 건네줘서 방금 캔 도라지가 담긴 걸 알고 얼른 인사를 하려고 보면 벌써 차창 밖으로 담배연기만 내뿜으며 저만치 가고 있었다.
‘혹시 이거 괜찮으면 드시겠습니까?’ 하면서 친구가 가져온 와인이라도 한 병 건넬라 치면 가타부타 한마디도 없이 맡겨놓은 물건을 돌려받듯 낚아채서는 차 뒷자리에 툭 던졌다. 검둥이 똘이가 마당에 들어오기만 하면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오줌을 지리고 잔디밭에 똥을 싸는데 내가 모종삽으로 똥을 치우는 것을 보면서도, ‘지 살던 집 아인교.’ 이 한마디가 다였다.
--- pp. 51~52

모처럼 멋을 낸 아내의 화사한 차림만큼 우리는 눈부신 봄볕 속에서 보리수 열매 따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저기, 요리조리 재빠른 놀림으로 한 움큼씩 훑어내는 아내의 손길에 맞춰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고개 너머 또 고개 아득한 고장…….’ 아내가 한껏 감정을 살려 따라 불렀다.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이런 여유와 정겨움이 얼마만인가. 전원에 사는 보람이요 예기치 않은 자연의 선물에 우리는 부자가 된 것 같았고 행복했다.
“정말 많이도 열렸네. 따도 따도 그대로야.”
“이제 그만 남겨 두자. 똘이 엄마 따다가 잼 만들게.”
“아유, 어찌 이리도 탐스럽니!”
아내는 우리의 풍성한 수확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탄성을 발했다. 하지만 그 기쁨의 탄성은 뒤이어 터진 날카로운 비명에 묻혀버렸다.
“아악, 뭐야!”
아내가 안고 있던 우리의 소중한 바구니는 허공에 내팽개쳐졌고 거기서 흩뿌려진 보리수 알들이 파란 잔디밭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깨갱!’ 언제 왔는지 귀를 뒤로 접은 수니가 부리나케 뒤란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 아내는 치맛단 아래 드러난 한 쪽 종아리를 연신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왜 그래. 쟤가 물었어?”
나는 허리를 굽히고 아내의 종아리를 살피며 손을 갖다 댔다.
“그 손 치워!”
아내는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팔짱을 낀 채 쌩하니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눈부신 햇빛 아래 뜰 안의 앵두며 보리수는 여전히 풍성했으나 갑자기 초라해진 나는 아내의 위태해 보이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 pp. 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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