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얼굴 빨개.” “너도 빨갛거든.” 지아가 웃음을 그치지 않자 인혁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고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지아의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목을 뒤로 당기며 피하려고 하는데 인혁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더 깊이 입 맞추었다. 처음이 아닌데도 처음보다 더 떨렸다. 바들 떨리는 지아의 어깨를 감싸 안는데 가는 체구가 품안에 쏙 들어왔다. 사과색으로 물든 뺨이 사랑스러워 살짝 깨물어봤다. 톡! 하고 과즙이 흘러넘칠 것처럼 탐스러웠다. 살짝 찡그린 눈썹도 예뻤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턱을 어루만지자 지아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목을 움츠렸다. 인혁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가슴이 콱 조이면서 지아를 더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한 것일까. 지아가 그의 손을 밀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돼.” “아무 짓도 안 했어.” “지금 막 하려고 했잖아.” “……글쎄?” 어물쩍 대답하며 시선을 돌리는 인혁을 보고 확신했다. 마지막까지 지아의 한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지아는 새삼 깨달은 얼굴로 인혁을 바라봤다. 햇볕에 그을리긴 했지만 도련님처럼 하얀 피부에, 소년처럼 마른 듯하면서도 성인 남자의 건장한 몸을 가졌다. 몇 번의 변성기를 거치며 점차 굵어지기 시작하는 목소리에 비해 여전히 학생다운 미소를 짓는다. 소년과 남자의 경계에 서 있었다. 정말 남자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아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한 번 더 키스하면 안 돼?” “또 만지려고 할 거잖아. 안 돼.” “얼굴만 만진 건데 그게 어쨌다고.” “손이 엉큼했어. 우린 어리다고, 나이에 맞는 교제를 해야지.” “알았다, 알았어.” 인혁이 두 손을 들고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잠시 지아가 방심한 틈에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결국 지아가 ‘뽀뽀귀신’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근신 중인 거 집에서는 모르지?” “으응. 말씀 안 드렸어.” “내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어.” 자책하는 표정을 짓자 지아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돌린 인혁은 그녀의 미소를 보게 됐다. “분명히 그 애들은 우리가 싸우길 바라고 그랬을 거야. 하지만 자기들이 실수한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분해할까?” 해맑게 웃는 지아로 인해 인혁의 가슴이 저릿했다. 혈관을 흐르는 피는 온도가 높아져 용암처럼 거칠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시계를 찬 지아의 손을 잡고 약지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십 년쯤 후엔 반지를 끼워줄게.” “그, 그때까지 만나고 있을까?” 지아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초로 케이크 표면을 긁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을 하는 인혁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져서 살며시 그를 봤다. 붉은 노을이 그의 얼굴에만 비쳐지는 듯, 붉어진 얼굴로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사뭇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반드시 만나고 있을 거야. 너야말로 대학가서 딴 짓 하지 마.” “너만 계속 옆에 있어주?, ……다른 사람 보지 못할 거야.” 인혁의 입술이 좌우로 찢어지자 지아는 자기가 말해놓고 민망해졌다. 플라스틱 칼로 케이크를 작게 자른 후 인혁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거나 먹어. 정말 너랑 있으면 부끄러워진다니까?” 부끄럽고 쑥스러운 건 분명한데도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탁! 바닥으로 면도칼이 떨어졌다. 하지만 인혁의 시선은 편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피로 보이려고 빨간 물감으로 휘갈겨 쓴 ‘사랑해’라는 문장은 본 단어의 뜻이 주는 달콤함이 없었다. 기괴해 보이는 스토커의 사랑고백이라면 물리도록 받아봤다. 이런 걸 사랑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면. 봉투 안에 넣어져 있던 면도칼은 날카로워서 자칫하면 깊은 상처를 낼 수도 있었다. 아들을 배웅하려고 뒤따라 나오던 예리는 그것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또 시작이니?” 유명 배우와 감독의 아들이라는 위치도 그렇지만 눈에 띄는 인혁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어렸을 때 어떤 여자가 인혁을 데려가 경찰에 신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정상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팬이 생긴다. 이래서 인혁을 연예계에 데뷔시키지 않았다. 인혁을 몇 번 본 친분 있는 방송 관계자가 수차례 설득을 하기도 했다. 예리는 그때마다 적당한 구실을 대며 거절해 왔다.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엄마가 전에 얘기했던 거 어때? 너 아직 학생이고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쉬우니까 공부도 할 겸…….” “됐네.” 인혁은 편지를 찢었다. “그런 일로 도망치는 성미는 아니라서.” 예리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예전에는 머리카락을 잘라 넣은 봉투를 받기도 했었다. 그때는 예리가 먼저 봉투를 열어봤는데 비명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후로 발신인 주소가 쓰여 있지 않은 편지는 인혁이나 철호가 먼저 개봉했다. 아침부터 즐겁지 않은 편지를 받아 인혁의 안색이 어두웠다. 인혁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꺼려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이런 연유로 친구라곤 소꿉친구인 태원뿐이었다. 예리는 인혁이 또래답게 더 많은 친구를 사귀길 바라고 있어서 이따금 한 소리를 하곤 했다. 꺼림칙한 기분으로 있는데 아파트 현관에서 지아가 나오는 게 보였다. 3일 만에 보는 그녀의 교복차림이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몰랐다. 지아가 그를 발견하고 교복 치마 양쪽을 잡아 흔들어 보인 후 검지와 중지를 펼쳐 브이자를 만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인혁의 입술이 실룩실룩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보면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가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등교를 한 지아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교무실이었다. 모여서 대화를 나누던 교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학교에 오면서 대충 인혁에게 전반적인 사정을 듣긴 했다. “지아 왔구나. 3일간 정말 미안했다.” 학생 주임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지아는 깜짝 놀랐다. 자기 잘못이 아닌 일에 이렇게 미안해하는 그로 인해 마음이 안 좋았다. “아니에요, 선생님. 3일간 오히려 방학 같았는걸요.” “너희 반에 최태원하고 강인혁이 학교에 잠복을 해서 범인을 잡았다. 너 오늘 학교 나오는 줄 알고 어제 네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려고 남아 있다가 잡힌 모양이다. 그런데 걔들도 사실은 협박을 받은 거라고 하더구나. 사주한 게 누구인지는 태원이가 알고 있었어. 일단 아침에 선생님들끼리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지 회의를 했는데, 네 뜻은 어떠니?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죄질이 나빠서 네가 원한다면…….” “선생님, 일단은 저한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학생들 일에 선생님들께서 관여하시려면 선생님 입장도 난처하실 것 같아요. 우선은 제가 차분하게 풀어보도록 할게요.” 믿음직스러운 얼굴에 학생 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은 차마 보지 못했다. 그녀가 나간 후 체육 선생이 학생 주임에게 다가왔다. “역시 항상 반장 자리를 해와선지 이런 일에도 침착하고 믿음직스럽네요. 오히려 저희가 부끄러워질 판이에요.” “반장을 해서라기보다는 성격 나름이겠죠. 그리고 저 애의 가정환경도 또래보다 성숙해지는데 한 몫을 했을 거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려는 걸까요?” 학생 주임은 곰곰이 고민했지만 답안을 한 가지밖에 낼 수 없었다. “뭐, 작년에 자기 반 불량학생들을 선도한 것처럼 대화로 잘 풀겠죠.” “그렇군요.”
점심시간에 여자 화장실 안에서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 손을 씻던 여학생은 그걸 보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낯익은 학생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자 말리려다가 그녀가 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지아는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서 담배 연기가 나오고 있는 화장실 안에 뿌렸다. “꺄아아아악!” 여러 개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곧 안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교복이 젖어 짜증스러?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온 함소정 무리는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 태연히 서 있는 지아를 보게 됐다. “너야?” 함소정이 이를 바득 갈며 묻자 지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로 대답을 대신하곤 함소정 무리를 자세히 살펴봤다. “원숭이 대장은 누구야?”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다소 빈정거리는 투로 얘기하는 지아에게 발끈한 소정이 벽에 기대 서 있던 대걸레를 지아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지아는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들고 있던 양동이로 대걸레를 막았다. “너로구나? 딱 유치해 보이네.” “뭐? 아앗!” 분해할 틈도 없이 지아가 양동이를 그녀 쪽으로 밀면서 놔버리자 균형을 잃은 소정이 화장실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지아는 팔짱을 끼고 딱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소정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의 몸에서 떨어진 물 때문에 엉덩이가 이미 젖고 말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바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여학생은 또다시 화장실 문이 열리자 이번에도 역시 깜짝 놀랐다. 상대가 가람이자 지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봤다. 그녀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가람은 소정과 지아가 대치해 있는 걸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 재미있는 짓을 벌였더구나? 혼자만 즐겁지 말고 나중에는 나도 같이 끼워줘. 얼마나 즐거운 건지 궁금하다.” “이 계집애가 뭐 하자는 거야?” 소정의 입에서는 차마 듣기 민망한 욕설이 거침없이 나왔다. 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귀를 후볐다. 그런 무심한 행동이 소정을 더 분개하게 만들었다. 소정이 지아에게 달려들자 오히려 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휘두르려던 소정의 주먹을 잡고 뒤로 팔을 확 꺾어버렸다. 소정이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둥을 쳤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해괴해 보일 정도로 팔이 꺾일 때까지 지아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소정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 잘 됐지? 선생님께서 친히 학생들끼리 해결해보라고 허락해주셨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차분하게 풀어보지 않을래?” “너, 너 이거 안 놔? 뭣들 하는 거야!” 소정이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치자 그녀를 돕기 위해 한 걸음 다가왔던 패거리들이 경고가 다분히 서린 지아의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지아는 그들 쪽으로 소정을 밀어버렸다. 중심을 못 잡고 허둥대는 소정을 간신히 추슬러주는데 지아가 손가락 마디마디를 꾹꾹 눌렀다. 그때마다 우둑우둑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화장실 안에 위협적인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쟤 정신 차리게 좀 해봐.” “잠깐, 쟤 이상해. 평소랑 다르잖아.” “저딴 범생이 왜 겁내는 거야? 됐어!” 소정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대걸레를 다시 들고 지아에게 덤벼들었다. 대걸레는 물에 젖어 있어서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 틈에 지아가 소정의 손에서 대걸레를 빼앗아 멀리 던져버리고는 다른 손으로 소정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잡았다. “악! 악!”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가자 눈물이 핑 돌아 소정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화장실 안으로 데려갔다. 변기 쪽으로 확 밀어버리자 소정이 양 손으로 벽을 짚으며 버텼다. 좀 전에 자신들이 담배를 비벼 껐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너는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작년에 보니까 이게 꽤 도움이 되더라고. 그럼,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볼까?” “꺄아악!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