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원래 이렇게 다정다감했던 거야 아니면 내가 자줘서 다정다감한 거야?” 유제품 코너에서 우유를 골라 카트에 담는 한상의 귀에 지혜가 속삭여 물었다. “자줘서.” 한상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대꾸하자 지혜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주 자줘야겠네.” 지혜가 말했고 이번엔 한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저기서 잔치국수 먹고 가자.” “그래.” 마트 안쪽 분식코너로 간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잔치국수 두 개를 주문했다. “열은 내렸네.” 한상이 지혜의 이마를 짚어본 후 말했다. “열은 내렸는데 몸살이 도질 것 같아.” “왜?” “몰라서 물어?” 지혜가 은밀하게 눈을 흘기는데 잔치 국수 두 그릇이 두 사람에 놓여졌다. 지혜와 한상은 쫑쫑 썰어진 김치와 김 가루가 어우러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치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나 어디서 자?” 국수를 떠먹던 한상이 묻자 지혜가 어디서 자고 싶은데? 하고 되물었다. “오피스텔.” “내일 아침에 나 밥 챙겨주려고?” “응.” “밥만 챙겨주려는 거야 다른 것도 주려는 거야?” 지혜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묻자 잔치국수 국물을 마시던 한상이 사래가 걸려 기침을 해댔다. “다른 거 뭘 원하는데?” “음…… 울트라 소시지?” 지혜가 카트 안에 담겨 있던 ‘계란 옷을 입혀 부쳐 먹으면 정말 맛있는 햄’ 이라고 적힌 소시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고 한상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웃음을 터뜨렸다. “너 너무 노골적인 것 아니야?” “노골적이지 않아. 난 분명히 우회적으로 표현했어.” 지혜가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잔치국수를 젓가락질 다섯 번 만에 다 먹어치운 지혜와 한상은 잔치국수 값 2500원을 지불하고 마트를 나왔다. “지혜야.” 오피스텔로 와서 마트에서 장을 본 것들에게 자리를 잡아준 후 개운하게 커피 한잔씩 만들어 마시는데 한상이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지혜를 불렀다. “응?” “내가…… 너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겠지?” “왜? 너 유부남이니?” “아니. 그런 거 아니라.” “여자, 도박, 빚, 사기, 살인, 출생의 비밀만 아니라면 적당히 숨겨도 돼.” 지혜의 말에 한상이 픽 웃더니 다시 정색을 했다. “여자 문제야.” 한상의 대답에 지혜가 한상을 쳐다봤다. “나 말고 자는 여자 있니?” “아니.” “그럼 무슨 여자 문제?” “전에 말했던…… 주인 집 딸 말이야.” “네 아버지 다치게 했다던 그 주인 집 딸 말이야?” “맞아.” “그런데?” “걔를 봤어.” “어디서?” “클럽에서. 놀러?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지나쳤어.” “왜?” “그냥 그렇게 됐어. 나도 모르게.” “…….”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상을 바라보던 지혜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흔들려?” “아니. 전혀.” “그럼…… 흔들릴 것 같아?” “아니. 전혀.” “그럼 됐어. 상관없어. 그런데 만약에 흔들리면 말해줘. 양다리 걸치는 남자하곤 안 놀아.” 지혜가 깨끗하게 마무리했다. “그냥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말해줘서 고마워.” 지혜가 정말 고맙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럼 나도 너한테 숨기는 게 없어야 하는 거야?” “그래주면 고맙고.” “숨긴다기보다는…… 네가 묻지 않아서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거든.” “뭔데?” 한상의 물음에 지혜의 표정이 잠깐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상을 쳐다봤다. “심각한 거야?”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유부녀야?” 한상의 물음에 지혜가 픽 웃었다. “우리 아버지…… 현직 검찰 청장이셔.” 지혜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한상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뭐라고?” “검찰 청장이시라고.” “…….” 한상은 검찰 청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아니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지혜가 놀랄 것 없다고 말했지만 한상은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상아.” “미치겠다.” 한참이나 굳은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보던 한상이 식탁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어제 편의점에서 산 캔 맥주를 꺼내 뚜껑을 따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한상이 먼저 말을 걸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한상은 캔 맥주를 다 마실 때까지 싱크대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지혜는 식탁에 앉은 채 불편한 표정으로 커피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한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난…….” 한상이 갑자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신랄하면서도 굉장히 서글픈 웃음이었다. “난 건달 놈인데 네 아버진 검찰 총장이라고? 난 틀림없이 너한테 턱없이 부족한 남자구나.” 한상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고 지혜는 찌푸린 얼굴로 한상을 쳐다봤다. “누가 그래?” “네 부모님이. 검찰 청장이신 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하고 사귈 거야?” “뭐?” “나하고 사귀는 거 아니야? 나하고 연애하고 나하고 키스하고 나하고 잘 거잖아.” “그러니까 난 결국 너하고 사귀기만 하고 결혼은 못하는 놈이란 말이지?” 한상이 거칠게 비아냥거렸다. “난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결혼 자체가 싫다고도 말했잖아.” “결혼하기 싫어서 연애도 싫다 했어 넌! 나하고 하는 건 뭐야? 연애 아니야? 그냥 잠만 자는 거야?” 한상이 거칠게 몰아세웠다. “잠 잘 남자가 필요해서 널 만나는 줄 알아?” 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쏘아붙였다. “그럼 난 뭐냐고! 나 갖고 노는 거야? 뭐 하는 짓이야 너!” 한상이 격하게 고함을 질렀다. “네가 좋아죽겠어!” 지혜가 소리쳤다.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네가 보고 싶고 네가 좋아죽겠다고!” “…….” “네가 건달인 것도 상관없고 아버지 엄마 아니 온 식구가 달려들어 뜯어말리면 너하고 꼭꼭 숨어 사는 한이 있더라도 뺏기기 싫을 만큼 좋아죽겠단 말이야!” 지혜가 격정적으로 소리를 친 후 획 돌아서서 창가로 갔다. “처음부터 말했어야 해!” 한상이 소리쳤다. “뭐라고? 우리 아버지 검찰 청장이니까 나한테 덤빌 생각 하지 말라고? 내가 왜 그런 유치한 짓을 해야 해?” “네가 말을 했다면…….” “했다면?” “…….” “수작은 내가 부렸어. 네가 나 꼬신 게 아니라 내가 했어. 검찰 총장 딸은 너 꼬시면 안 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우리 아버지가 검찰 총장인데 왜 네가 화를 내는 거야? 내가 검찰 총장 딸이고 싶어서 된 게 아니잖아.” “난 뭐야? 난 뭐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격분해서 소리치는 한상에게 지혜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한테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 다른 건 없어. 다른 건 필요하지도 않아. 다른 건 보이지도 않는다고.” 지혜가 한숨을 내쉬며 한상을 바라봤다. “넌 내가 윤지혜라는 것 외에 다른 게 필요해? 다른 게 보여?” “…….” “내가 검찰 총장 딸이라서 싫다면…… 그만 가.” 지혜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한 후 돌아서버렸다. 뒤돌아선 지혜를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던 한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피스텔을 나가버렸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지혜는 어쩌면 여기서 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