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
그의 그윽한 눈길을 받자 묘한 설렘이 일었다. 알 수 없는 뭔가가 몸속을 속속들이 누비며 감각들을 전부 헤집었다. 이상했다. 그 야릇한 감각에 긴장이 되어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주먹을 꽉 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누며 첫마디를 꺼냈다.
“벌써…… 와 있었네요?”
“셰리를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
그녀를 보자마자 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 빼준 의자에 그녀가 앉자 그는 그녀의 귓가에 살포시 얼굴을 내렸다.
“아름답군.”
“네……?”
깜짝 놀라는 그녀의 얼굴을 재밌어하며 그는 자리로 돌아와 태연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주문부터 하지.”
윤수는 낯짝 두꺼운 그의 얼굴을 흘기다 황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고급스런 메뉴판을 열었다. 프랑스어로 된 메뉴판, 일상용어라면 그래도 조금 알아볼 수도 있을 텐데 요리에 관한 전문 용어들이라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윤수는 메뉴판을 도로 덮으며 그에게 돌려주었다.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알아서 시켜주세요.”
그 말에 강희는 저 멀리 서있는 나이 지긋한 직원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백발의 직원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예요? 미리 주문해둔 거예요?”
“셰리가 메뉴를 정하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둔 것뿐이야.”
“대단하시네요,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때 직원 한 명이 두 사람 앞으로 와인 잔 두 개와 와인을 내려놓았다.
“와인 시키셨어요?”
“Aperitif라고 프랑스 코스 요리의 전주로 나온 와인이야. 할아버지의 건강상 문제로 슈렌가에서는 건너뛰는 부분이지.”
“코스로 시키신 거예요?”
“이곳은 프랑스 전통 코스 요리가 유명한 레스토랑이야. 슈렌가는 개인적인 취향에 맞춰 생략하거나 간략히 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풀코스는 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이리로 예약을 잡은 거지.”
고개를 끄떡이며 윤수는 직원이 따라놓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음, 꽤 독한데요? 지난 번 집에서 마셨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약간의 향을 느낄 정도로 마시면 돼.”
이어서 다이아몬드형의 사기 접시에 아뮤즈겔이 나왔다. 검지와 중지를 합친 정도의 적은 양이었지만 그 모양이 너무 앙증맞았다. 요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이런 게 바로 프랑스 코스 요리구나. 신기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멋진 음악 들으며…… 어라? 그러고 보니 이렇게 좋은 레스토랑에 왜 사람이 없지?’
주변을 둘러 본 윤수는 텅 빈 테이블들을 발견했다.
‘설마 여길 전세 낸 건가?’
눈앞의 남자라면 가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기에 그녀는 기대에 蓼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강희 씨, 혹시…… 여기를 통째로 빌리신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그렇잖아요, 저녁 시간인데 우리 말곤 아무도 없잖아요.”
와인 잔을 내려놓은 그는 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틀렸어.”
“아니라고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구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정장을 차려입은 노년의 신사들과 부인들이 조용히 들어왔다. 부부 동반 모임을 하는 건지 그들은 긴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완전히 빗나간 추측에 윤수는 귀까지 빨개졌다. 앞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강희가 재미있다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셰리가 그런 걸 좋아하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전세라도 냈을 텐데, 실망감을 안겨줘서 어쩌지?”
“놀리는 게 아니라면 그만하세요. 진짜 전세를 냈다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화를 낼 참이었거든요.”
“실은 전세를 내려고 했어. 하지만 생각을 바꿨지. 나의 셰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졌거든.”
그때였다. 방금 들어온 노년의 신사 한 명이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인사드리지요, 전 아망가르 물산 대표 필리프 헝베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년의 신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남자는 더할 수 없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악수에 응했다.
「이분이 바로 소문의 약혼녀로군요. 전해들은 것 이상으로 아름다우십니다.」
나이 든 신사의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윤수는 그 남자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충 눈치껏 미소를 지었다.
「오, 이런! 제가 두 분의 귀한 시간을 빼앗았군요. 전 이만 자리로 돌아갈 테니 즐거운 식사 하도록 하시지요. 슈렌가의 귀한 분을 만나 영광이었습니다.」
강희가 답례로 짧게 고개를 끄떡이자 그는 들뜬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아는 분이에요?”
노년의 신사가 멀어지자 윤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모르는 사이예요? 그런데 왜 강희 씨한테 말을 걸어요? 보니까 자기소개 하는 것 같던데.”
강희는 자리에 도로 앉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곳 프랑스에서, 그것도 정치, 경제,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날 모르기 어렵지.”
“자기자랑 하는 거예요?”
“자랑이 아니라 현실이야. 셰리와 함께 바깥출입을 자주 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거거든.”
“그럼 오늘은 왜…….”
“말하지 않았나, 그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고 말이야.”
왜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윤수는 입을 다물고 앞에 놓인 아뮤즈겔을 먹었다. 어차피 물어도 그는 느끼한 말로 장난처럼 대응할 게 뻔하니까. 그래도 그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니 놀라우면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투명한 유리로 덮인 천장 너머 어두운 먹구름이 꿈틀대며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두워져가는 도시에 하나 둘씩 불이 밝혀졌다. 하늘로 쭉 뻗은 에펠탑과 그 주변을 감싼 건물들의 환상적인 조화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화려한 야경과 함께 윤수는 열네 단계나 되는 코스요리를 맛있게 먹어치운 뒤 레스토랑을 나왔다. 건물 바로 앞에 그들을 태울 차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윤수는 식사만 하고 돌아가기가 못내 아쉬웠다. 첫 나들이인데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배도 부른데 좀 걸으면 안 돼요?”
“곤란한데. 말했다시피 난 유명인사거든.”
“풉! 사람들은 생각보다 둔한 편이라는 걸 잘 모르시나 보네요. 이 밤에 강희 씨 같은 유명인사가 이런 거리를 걸을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이나 하겠어요? 그냥 닮은 사람이려니 하고 말겠죠. 거기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과 볼거리들이 있는데 강희 씨한테 눈길이 갈 거라고 생각해요?”
“날 너무 무시하는 발언이군.”
“무시하는 게 아니라 과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는 거예요. 뒤에서 따라다니는 경호원들만 없어도 우리도 평범하게 보이거든요.”
강희는 잠시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뒤따르는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경호원이 다가와 강희의 귓속말을 잠시 듣더니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경호원들을 물린 그는 넓은 거리로 한 발짝 내밀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셰리의 말처럼 평범한 연인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해맑은 미소와 함께 윤수는 강희의 손을 맞잡았다. 커다란 손에 그녀의 손이 쏙 들어갔다.
그와 발을 맞추며 거리 한복판을 걸어가니 진짜 연인이 된 것처럼 설레었다.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윤수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했다. 사람 사는 세상이야 다 똑같겠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고국에서의 평범한 일상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번쩍번쩍 빛나는 화려한 간판, 그 아래 쇼윈도 안을 장식하는 패셔너블한 옷들과 보석, 여러 개의 노천카페들을 보며 윤수는 친구들과 자주 ?러 다니던 한국의 번화가를 떠올렸다. 순간 국적은 달라도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닮았다는 생각에 편안함이 밀려들었다.
어쩌다 힐끔힐끔 두 사람을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강희와 윤수가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는 그냥 여행객이려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구경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퐁데자르 다리로 들어섰다. 센(Seine) 강에 놓인 수십 개의 다리 중 차가 다닐 수 없는 유일한 나무 다리였다. 퐁네프 못지않은 유명세를 자랑하는 예술의 다리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와 와인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편안하게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볼거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윤수의 감각은 레스토랑을 나온 뒤부터 쭉 그와 맞잡은 손에 몰려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그를 바라봐도 약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그와 잡은 손에 온 신경이 쏠렸다.
다리 중앙에 멈춰 선 두 사람은 강을 따라 흐르는 유람선을 내려다봤다. 유람선은 현란한 불빛을 뿜어내며 관광객과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와, 유람선이다. 강희 씨도 타본 적 있나요?”
“아니.”
“여기 살면서 아직까지 타본 적이 없어요?”
“흥미가 없으니까.”
번잡하지만 각자의 재미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윤수는 뒤를 돌아다봤다. 어느 사이엔가 경호원들의 존재가 눈에서 없어졌다. 다시 마음을 놓은 그녀는 그와 발을 맞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바이올린 연주가 그녀의 귀를 건드렸다. 잔잔한 선율 소리가 다리 위를 부드럽게 장식하며 울려 퍼지자 조금씩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윤수도 강희와 함께 그 연주를 듣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센 강을 타고 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듣는 바이올린 연주는 꽤나 운치 있었다. 곡이 끝나갈 무렵 윤수는 고개를 돌려 강희를 올려다봤다. 오렌지 빛 조명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보며 그 내면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정체를 상상해보았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단단하고 넓은 저 가슴 안에 대체 어떤 두려움이 아직도 저 남자를 괴롭히고 있는 걸까?’
그가 눈치를 챌까 금방 고개를 돌렸지만 들끓는 궁금증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이 전달된 것인지 윤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까지처럼 모른 척 덮어두면 되는 건데…… 그러면 되는 건데, 왜 이렇게 초조한 걸까? 이 남자에 대해 알며 알수록 그래. 더 궁금하게 만들고 더 조심스럽게 만들고. 난 어떻게 해야 좋을까?’
“강희 씨, 질문이 있는데요…….”
윤수의 말에 강희가 그녀에게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입을 떼지 못했다. 두 갈래로 갈라진 마음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물어볼까? 가비노와 어떤 사이였냐고,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눈 딱 감고 말해버릴까?’
하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윤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에펠탑의 아름다운 불빛 탓일까? 그녀의 가슴이 어지러운 머리와 달리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숨이 가빠진 그녀는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저기 에펠탑 위에는 가봤어요?”
“아직.”
“그럼…… 다음에 같이 갈래요? 오늘처럼 경호원 떼고 오면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지.”
순순히 대답하는 그 때문에 윤수는 머쓱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는 척 그녀는 딴 소리를 내 놓았다.
“역시 나오길 잘했죠? 보세요, 비온 뒤라 덥지도 않고, 음악 소리도 들리고, 사람도 많잖아요. 강희 씨는 이런 거 싫어요?”
“글쎄, 하지만 한 가지는 마음에 들어.”
“한 가지요?”
“사람들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점, 그래서 셰리와 평범한 연인이 되었다는 점.”
“평범한 연인……이요?”
동그랗게 뜬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그는 윤수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강하게 밀착시켰다.
“가령 프렌치 키스를 한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점 말이지.”
“키, 키스라니 설마 여기서 그러겠다는 건 아니겠죠……?”
그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까지 내려왔다.
“어쩌지? 그 설마가 맞는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내려왔다. 그리고 정열적으로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물컹한 혀가 그녀의 입 안을 점령했고, 커다란 손이 가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주변을 의식하던 그녀도 어느새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그를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하는 키스가 아님에도 그녀의 입술은 수줍게 떨렸다. 하지만 와인의 달콤한 향이 혀끝에 맴도는 것처럼 그가 주는 달콤한 감각은 그녀의 수줍음을 짜릿함으로 바꿔주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