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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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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름 | 가하 | 2013년 01월 0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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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1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434쪽 | 450g | 128*188*30mm
ISBN13 9788966474677
ISBN10 896647467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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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물을게요. 저의 조건을 수락하실 의향이 있으세요?”

“이혼을 전제로 하고 각방을 쓰자는 거?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결혼생활에 사랑 따위는 없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는 무심하게 핵심을 꼬집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버린 그녀는 시선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래도록 쳐다볼 마음이 없는데 눈빛을 이동할 수 없었다. 함부로 도망치지 말라며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긴장감이 극대화되었다. 엉겁결에 마른침을 삼킨 인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하실……. 읍!”

날벼락처럼 하윤의 입술이 날아왔다.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입 안으로 과감히 혀를 밀어 넣었다.

서늘히 얼어붙은 인설은 머리 위로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했다. 그러면서 희한하게도 입 안을 휘젓는 그의 입김과 혀가 불덩이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얼이 빠진 상황에서조차 뜨거운 감촉이 적나라하게 살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인 그녀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감싼 하윤은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가볍게 맛만 보려던 생각을 잊고 사시사철 녹지 않는 만년설처럼 차가운 그녀의 입술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짜릿했다.

그러나 적당히 해야 옳았다.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그는 아연실색해 있는 인설의 눈망울을 마주 봤다.

“사랑은 불꽃같다더니, 그 말이…….”

찰싹!

말이 끝나기도 전 그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밭은 숨을 몰아쉬고 예의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측면으로 얼굴이 밀려난 하윤은 실없이 픽 웃었다. 느긋느긋 턱을 돌리며 화가 잔뜩 난 여우처럼 째려보는 인설의 눈빛을 눈동자에 담았다.

“조건을 어기면 이 꼴이 되는 거군.”

예습을 뼈저리게 했다는 듯 수려한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분을 삭이느라 손등이 허예지도록 주먹을 말아 쥔 인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소파에 놓여 있는 핸드백을 주워들고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한 달 뒤 어때?”

하윤은 결혼식 날짜를 물었다. 이리저리 잴 것 없이 서둘러 해치워버리자는 뜻이었다. 동작을 멈춘 그녀의 얼굴이 불편하게 일그러졌다. 어떤 말도 듣지 않은 척 매정하게 외면하고 싶은데 이놈의 세상일이 어김없이 뜻대로 안 되고 난리였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풀려 있는 재킷의 앞단추를 채우며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인설의 곁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결혼하자. 너하고 결혼하고 싶다.”

“?”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인설이 그를 올려다봤다.
역시 미쳤어. 제정신이 아닌 남자야.
정면을 바라보던 하윤의 눈동자가 덤덤히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거듭 말하지만 사랑은 빛이야. 눈 깜짝할 새 숨어드는 빛. 그 빛이 내 가슴에 비췄어. 아직은 약하지만 빠른 속도로 찬란해질 것 같아. 그렇다고 겁먹지는 마. 널 다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연락할게, 조심히 들어가.”

산속에서 도를 닦은 도인처럼, 그것보다는 백년 묵은 능구렁이처럼, 아니 사랑의 화살을 쏘는 장난꾸러기 아모르처럼 해사하게 미소 짓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나갔다. 어둡게 그늘진 인설의 눈망울이 유유히 멀어져가는 하윤의 뒷모습을 좇았다. 짜증스러운 듯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웃기지 말아요. 당신은 나에 대해 모르잖아요. 예전에 누군가도 당신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너라면 내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고. 너라면 죽을 때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너라면 세상의 편협한 이목을 무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시야에 담기는 그를 지워버리려는 것처럼 파르르 경련하는 속눈썹을 덮었다.

‘두 번 다시는 현혹되지 않아. 사랑 따윈 안 해!’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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