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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법원에 대한 어느 변호사의 외로운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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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1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309쪽 | 470g | 153*224*30mm
ISBN13 9788964950456
ISBN10 896495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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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안천식
1966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예천중학교,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2월부터 1990년 7월까지 포항제철 주식회사에서 기능공으로 근무하였다. 199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고 졸업하였으며, 2007년 서울시립대학교 조세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까지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법조윤리협의회 전문위원, 대한변협 사법인권소위원회 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 anch998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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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7일, 서울고등법원 서관 제306호 법정, 나는 서둘러 법정에 도착했다. 9시 45분, 아직 판결 선고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법정 앞에 게시된 선고 목록을 살펴보았다. 서울고등법원 2012재나23**호 재심사건은 선고 목록 맨 마지막에 기재되어 있었다.
2010년 4월 24일에 선고된 2009재나37** 사건 때도 그랬다. 당시에도 목록 맨 마지막에 사건이 기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날 선고 시간이 1~2분 가량 지난 뒤 법정에 도착했다. 당시 담당재판부는 선고 목록 마지막에 기재된 사건(2009재나37**호)을 가장 먼저 선고했다. 우리가 법정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른 사건을 선고하고 있었다. 결국 선고를 듣지 못해 나중에야 결과를 알게 되었다. 패소였다!
이번에도 선고 목록에는 2012재나23**호 재심사건이 맨 마지막에 기재되어 있다. 지난번처럼 가장 먼저 선고될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기을호가 도착했다. 우리 두 사람은 법정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잠시 후 세 명의 판사가 차례로 입장했다. 재판장을 필두로 두 명의 배석이 자리를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눈이 심상찮다. 방청객을 한번 쓱 둘러본 뒤 재판장이 판결을 선고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선고 목록에 기재된 순서대로 판결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건 차례였다. 순간 나는 긴장했다.

“2012재나23** 소유권이전 등기 청구 등 재심사건, 피고의 재심청구를 기각한다. 본건 재심에 관한 소송 비용은 모두 피고가 부담한다.”

순간, 법정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잘못 들은 건 분명 아닌데…….’
옆에 앉아 있던 기을호가 맥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딱딱한 법정 의자에 엉덩이가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미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숨만 겨우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든 움직여봐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들었다. 나는 겨우 일어나서 입술을 열었다.
“재판장님 2012재나23**호 판결 기각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판장은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무슨 사건이요?”
“2012재나23**호 재심사건입니다.”
“아, 그거요. 법리적인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는 곤란하고, 판결문에 있으니까 읽어보세요. 간단히 얘기하자면, 형사사건에서 위증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해 재심사건에 대해 법정에서 위증한 게 아니라서 법률상 재심 사유가 안 된다는 입장이에요. 민사사건에 위증한 부분은, 그 부분을 빼더라도 재심 대상 판결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재심 사유가 안 된다고 보고…….”
재판장은 지난 2009재나37** 사건 판결이유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불기소 기각한 부분에 대한 증거는…….”
나는 변론 종결 후〈증인C〉의 위증고소에 대한 검찰의 ‘공소권 없음 불기소 처분이유서’를 참고자료로 제출하면서 변론재개 신청을 한 것에 대해 묻고 있었다. 재판장이 내 말을 가로챘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판결문에 충분히 쓰여 있으니까 읽어보세요. 말로 다 설명을 하기에는 사안 자체에 법리적인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에…… 판결문을 한번 읽어보세요.”
‘판결문에 다 쓰여 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판결문에 다 쓰여 있다’고 일축하니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법정 경위가 다가왔다. “저, 나가시죠.”
나는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어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서 있었다.
잠시 뒤 재판장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흠…… 재판 준비가 될 때까지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재판부는 우르르 법정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겨우 눈을 들어 법정 안을 둘러보니,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심호흡을 해보았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겨우 법정을 빠져나왔다. 법정 밖에는 기을호와 그의 두 아들이 창문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판결문에 다 써 있다…… .”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도저히 사무실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을호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서울중앙지방법원과 검찰청 사이에 있는 야외 휴게실의의자에 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고 끝없이 되뇔 뿐이었다.
“변호사님, 그동안 저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처구니없지만…… 너무 상심 마세요.”
언제 왔는지 기을호의 큰아들 준영이가 앞에 서 있었다. 2005년 H건설과의 소송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 준영이는 막 군대를 제대한 청년이었다. 그 사이 8년이 흘렀고 준영이는 서른을 훌쩍 넘긴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걱정이에요.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것 같아요. 그저께는 새벽에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도둑이 들었다면서 온 집안사람들을 다 깨우고 한참 동안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나마 소송에서 이기면 좀 나아지시려나 했는데…… .”
기을호는 1년 전부터 기면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스트레스와 노화가 원인이라고 하였다. 기을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0년이 넘게 군대에서 장교 생활을 했다. 태권도와 검도로 단련되어 건강만은 누구 못지않다고 자신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8년씩이나 계속된 송사를 견뎌내지 못하는 듯하였다.
8년 동안 민사소송만 무려 열일곱 번이나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 계속되었다. 모두 패소하였다. 형사고소 사건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다. 단 한 건도 패소하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었다. 기을호의 건강한 몸도 이해할 수 없는 오랜 송사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며칠 뒤 사무실로 판결문이 도착했다. 서둘러 판결이유를 읽어보았다. 복잡한 수수께끼를 써놓는 듯하였다. 판결이유 어디에도 검찰의 공소권 없음 불기소 처분에 대한 변론재개 신청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판결문에 충분히 써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단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건 아니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나는 혼잣말을 되뇌이면서 멀뚱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길거리로 나선 나는 어딘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열일곱 번의 소송 과정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1장 판결의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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