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텔레비전에서 어느 한심한 놈이 그런 강의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을 괴롭히는 101가지 방법 중, 듣는 척하며 지며리 침묵하기. 아내는 아침부터 새로운 수법을 들고 나왔다. 현관을 나서며 퇴근하는 대로 옥실엘 다녀오마고 존조리 알렸으나 아내는 고집스럽게 듣는 척만 했다. 함께 등교하던 중학생 딸이 보다 못해 참견했다. 아빠, 오늘이 또 그날이야? 나는 금세 아내의 수법을 배워 써 먹었다.
“이 쌤, 무슨 일인데?”
종료 버튼을 누르고 안전벨트를 매는데 임현우가 따졌다. 내 옆의 건너 자리에 앉아 있던 임현우가 화장실 가고 없기에 이때다 싶어 도망쳤는데, 귀신같이 알고 식당의 전용 주차장까지 뛰어왔다. 나는 유리창을 반쯤 내리고 멋쩍게 웃었다.
“꼭 가야 돼?”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건너다보는 임현우의 눈빛이 애틋했다.
“미안하다.”
“알았다고. 내일 보자.”
허탈한 표정의 임현우가 담배를 빼 물었다. 나는 유리창을 올렸다.
올봄에 나는 임현우의 권유로 배드민턴 동호회에 들었다. 하필 오늘이 월례회가 있는 날이었다. 사범대학 과 동기인 임현우는 나보다 일 년 먼저 전근 와 있었다. 임현우는 모임이 끝나면 머리도 식힐 겸 나와 한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도 요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임현우에게 정말 미안했다. 공교롭게 날이 겹쳤다.
나는 출발하며 오디오를 켰다. 아침에 출근하며 듣다 만 쇼팽의 녹턴이 저물녘의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두 시간쯤 멍 때리고 있으면 낯익은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은 고비늙은 노파처럼 볼품이 없어졌지만, 한때는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던 젖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저수지를 ‘옥골못’이라 불렀다. 그 저수지를 끼고 다시 산속으로 한참 올라가면 나, 순호, 소희가 태어나고 자란 옥실이 있다. 면소재지에서 십 리나 떨어진 마을에서 다시 오 리를 더 발품을 팔아야 가까스로 나타나는 두메였고, 다섯 집이 전부였다. 유신이 일어나던 해 한 달 간격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태어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자라 스스럼없었고, 친형제처럼 띠앗 좋게 지냈다. 우리는 면소재지의 초등학교는 물론 읍내의 중·고등학교도 함께 다녔다. 읍내까지는 이십 리가 실한 길이지만 등굣길만큼은 늘 함께했다. 누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동구 앞 느티나무 밑에서 서로를 기다렸다가 나란히 출발하곤 했다. 옥골못 옆 개울을 건너고 몇 개의 마을과 들판을 지나고 다시 강둑을 따라 아스라이 이어지는 등굣길은 사철 시고 음악이고 그림이었다.
순호에겐 우리보다 두 살 아래인 여동생이 있었다. 얼굴이 익은 도토리처럼 야무지고 눈동자가 유독 까맸던 순영은 늘 우리 틈에 끼이고 싶어 안달했다. 그러나 순호는 턱도 없었다. 어쩌다 심부름 시킬 일이 있거나 짐을 들릴 일이 있을 때만 순호는 큰 선심을 쓰듯 걸음을 늦추어주곤 했는데, 착한 순영은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마음에 그 수고로움마저 흔쾌히 감내했다.
며칠 전에, 그 순영을 학교에서 만났다. 정확히는 현관에서 외곬으로 맞닥뜨렸다. 나는 상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상진의 어머니를 배웅하는 길이었고, 순영은 담임의 상담 요청을 받고 급히 들어오던 길이었다.
--- 「자전거 훔쳐 탄 녀석」중에서
어느덧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간다. 옛 어른들 말씀이 ‘세월이 살 같다’고 하셨는데, 요즘의 내가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게는 요즘이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행복하다. 늘 꿈꾸고 갈망하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작가의 길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기억컨대 내가 처음 소설이라고 써본 게 중3 때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부터 그 마음이 한 번도 바뀌어본 적이 없다. 어느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승이 화두를 붙잡고 참선하는 것은 내 안에 부처가 있음을 깨닫기 위함이라 했는데, 어쩌면 내가 소설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것은 내 안의 그 이유를 깨닫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내 문학의 원천은 고향 집 뒤꼍의 우물이다. 어느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고향 집 우물이 원고지라면 의봉산은 나의 붓이었다고. 이 자리에서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내 문학을 있게 한 자양분은 책도 도서관도 변변히 없던 어린 시절에 선친에게서 들었던 많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례로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자전거 훔쳐 탄 녀석’은 내 고향 마을 절골(寺谷)의 전설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쓴 것이고, 이 작품 말고도 알게 모르게 그런 영향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나는 작의를 매우 중시한다. 아무리 좋은 글감이라도 그것이 선명하지 않으면 섣불리 덤벼들지 않는다. 끙끙거려 봐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은 작의가 각각 다르지만 ‘슬픔’을 기본 정조로 한 단편들의 모음이다. 그래서 제목을 별도로 붙였다.
계획이 일 년 앞당겨졌다. 대구문화재단 덕분이다. 얼떨결에 신청한 공모 결과 발표를 보고 내 머릿속은 잠깐 복잡해졌다. 그러나 이내, 행운이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이유다.
지난여름 장편소설에 이어 이번 소설집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끝까지 배려해 주신 이영철 청어출판사 대표님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드린다.
2019년 늦가을
이연주
--- 「작가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