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미력하나마 사회의 어두운 곳에 힘을 보태기 위해 하남시 소재의 장애인 단체와 외국인 센터 등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동서양 고전, 특히 노자, 장자의 도에 주목하여 오늘에 맞는 동양인의 철학을 모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장자』내ㆍ외ㆍ잡편을 풀어쓴 철학우화집 『장자, 영혼의 치유자』, 『평범하라, 그리고 비범하라』, 『초월하라, 자유에 이를 때까지』 등이 있다. 현 하남시 고문변호사이며, 하남평생교육원에서 '장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붓다는 그날 영취산에 있었다.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붓다의 설법이 예정되어 있었다. 많은 제자들이 붓다의 발아래 모여들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스승이 설법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스승은 말문을 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제자 중에 누군가가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러나 붓다는 그 말을 듣고도 말문을 열지 않았다. 다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붓다의 회상(會上)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회중에 감지되었다. 한참 후에 누군가가 침묵을 깨며 재차 간절히 외쳤다. “세존이시여,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붓다는 말없이 고요히 앉은 채로 좌중에게 꽃을 한 송이 들어보였다. 이것이 그날 설법의 전부였다. 붓다는 일체의 언설(言說)을 생략한 채, 다만 꽃을 한 송이 들어 올렸던 것이다!--- pp.23-24
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선악의 판단도 상황에 따라다를 수 있다. 가령, 양귀비(楊貴妃)는 천하절색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그것은 당나라 말기의 느끼한 취향이 반영된 것이지 지금의 취향과는 다른 것이다. 양귀비의 별명이 ‘비비(肥妃)’, 즉 뚱뚱보였는데 그렇다면 그런 몸매로 요즘 미스 차이나(Miss China)에 출전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평상시에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로 처형되는데, 전쟁에 나가 사람을 죽이면 잘했다고 훈장을 받는다. 어느 게 옳은 것인가? 행위의 윤리규범을 정한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내린 가치평가의 정당성을 누구로부터 위임받아 어떤 때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는 것인가?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훈장을 받아야 할 일인가? 노자는 여기서 우리 인간세계의 여러 영역에서 별 생각 없이 행해지고 있는 가치평가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간략하게 지적하며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있다.--- pp.66-67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꽂혀있는데 그 바퀴통의 빈 공간(無) 때문에 수레로서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꽂혀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바퀴통의 중심에 빈 구멍이 있어서 30개의 살이 하나의 수레바퀴통에 집중될 수 있게 되어있다. 따라서 얼핏 보면 바퀴살이나 바퀴통이 수레를 움직이는 데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수레바퀴통 중심에 있는 수레 축을 끼울 수 있는 빈 구멍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온갖 힘들의 연결점 인 이 빈 구멍 없이는 수레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빈 공간 때문에 비로소 수레가 수레로서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pp.186-187
다산은 어떤 환경에서도 책을 펼쳐서 본분을 지키려 했다.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박함을 책을 통해 멀리하고, 대신 우직하고 깊은 마음을 챙겼다. 좋은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확 트이고 눈이 열린다. 그러면 봐야 할 것이 제대로 보인다.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움켜쥐고 있는 걸 내려놓고 진정으로 챙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게 된다. 그로 인해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살피게 된다.--- p.51
조선시대는 사상적으로 극히 폐쇄된 사회이다. 당시 중국은 이미 사상적으로 크게 개화되어 주자학 이외에도 양명학이 자유롭게 토의되었고, 거기에 서학(西學)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우리의 사상계는 주자학 하나에 매달려 다른 세계를 내다보지 못하였다. 이런 폐쇄된 상황에서 박세당보다 한 세대 앞서 윤휴(尹?)가 주자의 학설에 반론을 제기하다 역시 사문난적으로 몰려 정치적으로 실각하면서 유배당해 사약을 받고 죽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상적 편협함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정신적으로 답답함을 느끼고 살았을 것이다. 국가가 백성들에 대해 광기어린 통제와 탄압을 지속하는 상황에서 정면대응을 감행하여 수준 높은 저작물을 남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모를 드러내기도 전에 이미 거세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박세당으로부터 두 세대 정도가 흐른 뒤에 또 다시 정신의 자유를 찾아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정약용(丁若鏞)이다.--- pp.236-237
노자의 탄식 속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통상의 다른 철학자들처럼 노자는 자신은 위대하고 세상이 천박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노자의 특이한 점이다. 소크라테스만 해도 그가 아테네 법정에서 구사했던 자기옹호의 변론을 들어보면, 그것은 다방면에 걸친 인생의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국 아테네의 어떤 누구도 소크라테스 자신 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노자는 소크라테스와는 정반대의 관점에 서있다. 노자에 따르면, 지혜롭고 영특하며 똑똑하고 쓸모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고 오히려 자기는 우매하고 어수룩하고 촌스럽다는 것이다. 공개리에 남보다 자기가 더 못났다고 말하는 노자, 이런 사람을 상대로 우리는 결코 싸울 수 없다. 그래서 노자에게는 결코 적이 없다. 고요한 물처럼 노자는 소리 없이 우리 옆을 흘러간다. 주변의 만물을 촉촉이 적시면서. 우리는 노자가 우리 곁을 지나가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노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