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당시는 최선을 다했다하고 여긴 글인데, 항상 뒤돌아보면 왜 이렇게 아쉽고, 민망하고, 후회가 밀려오는지……, 가끔 괴로워 자학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도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이야기, 언젠가 시간이 지난 뒤 펼쳐들었을 때 조금이라도 후회가 덜 남는 글을 쓰기 위해 몸부림 중입니다.
“미안합니다. 그냥 가볍게 물놀이를 하고 싶어서.” 걸륜은 아직 가파른 숨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 탓에 다소 불규칙한 숨소리를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 앉는 그녀를 보며 말없이 목잠을 던지듯 건네주었다. 목잠을 손에 쥔 청아는 얼른 한 팔로 물에 젖어 속살이 고스란히 내비치는 가슴 부근을 가리고는 사내의 옆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나 다친 데는 있지 않나 하고. 한데, 불어온 서늘한 바람 탓이었을까? 등골을 스쳐오는 전율에 청아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작은 탄성을 안으로 꿀꺽 삼키며 살짝 어깨를 떨고 말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낯선 사내의 서늘한 옷자락, 왠지 모르게 그의 모습에서 뇌리 한편에 깊숙이 박혀버린 어릴 적의 삽화 한 장면이 스쳐갔다. 꽃을 가지고 싶다는 저의 말에 순식간에 연못물을 가르고 꽃을 꺾어온 소년. 그리고 그의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던 투명한 물방울. 스르르 겹쳐지듯 사내의 모습에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이내 물거품처럼 툭 꺼졌다. 그러자 별안간 가슴이 싸해져 왔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아이였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뜨린 청아는 옷을 벗어둔 곳으로 가기위해 일어서다 설핏 사내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 빠르게 사내의 옷자락을 보던 청아는 곧 까만 자갈돌 위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액체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때마침 그때 사내가 걸치고 있던 장의를 벗었다. 얼룩덜룩 핏물이 밴 하얀 속의 사이로 움푹 팬 듯한 상처가 시야에 잡혀 들어왔다. 깜짝 놀란 청아는 재빨리 사내 곁으로 다가가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자신의 모습이 어떤가, 미처 살필 겨를도 없었다. 암벽처럼 근육으로 단단히 올라붙은 사내의 늑골 부근에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 막 붉은 새 살이 차오른 규형의 상처자국이 보였다. 피는 그 상처 위를 다시 사선으로 갈라놓은 살갗 틈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목잠이 스치면서 낸 자국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청아는 가지고 있던 목잠으로 자신의 속의 단을 찢어 재빨리 상처부위에 꾹 눌렀다. 샘물 솟듯 흐르는 피를 보자 급한 마음에 달리 생각할 틈이 없었다. 고통스러운지 엷은 신음성이 흐르면서 사내의 관자놀이 부분에 핏줄이 살짝 잡혔다. “미안합니다.” “덧났을 뿐이니 괘념치 마오.” 근처에 있던 느릅나무에 몸을 기대며 사내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상처나 고통에 익숙한 듯한 어조였다. 오랜 운동과 무예로 잘 단련된 몸이란 걸 청아는 단박에 알았지만 세상에 아픔이란 것에 무감할 사람은 없었다. 상처 앞에서 느끼는 고통은 누구나 다 똑같을 터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고통을 잘 참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뿐. “그대로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청아는 그러면서 재빨리 풀숲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곧 하얀 바탕 위에 진분홍빛 자잘한 점이 박힌 풀꽃을 본 그녀의 두 눈이 환해졌다. 풀꽃은 수료(水蓼 여뀌)로 지혈작용을 하는 효과가 있었다. 곧 민첩하게 풀을 뜯은 그녀는 반듯한 돌덩이 위에 올려놓고 자갈돌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걸륜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녀의 동선을 쫒고 있었다. 이윽고 끈적끈적하게 변한 약초를 가져온 청아는 걸륜의 상처부위에 꼼꼼하게 펴 바르곤 그 위를 자신의 속의 단을 길게 찢은 천으로 꼼꼼하게 둘러싸기 시작했다. 한 번도 그렇게 서두르거나 침착성을 잃어본 적 없는 그녀였지만 워낙 생각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조금은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좀 따갑고 쓰리겠지만 조그만 참으십시오.” “…….” 응급처치를 끝낸 청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쏠려온 사내의 눈빛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사내는 마치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청아는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제야 비로소 반라에 가까운 자신의 몰골이 의식되었다. 가슴과 어깨 사이를 이어주는 두 개의 가느다란 끈, 그 아래로 물에 젖어 습자 종이처럼 착 달라붙은 가슴가리개는 여과 없이 속살을 그대로 투영시켜주고 있었다. 속단이 뜯어져 나간 허리 아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릎 위로 한 뼘이나 올라간 속의는 대퇴부와 착 달라붙어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몸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망하여 고개를 돌리며 그녀가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참이었다. “……!” 손끝에 와 닿는 서늘하고 묵직한 감촉, 사내의 손이었다. 손목이 붙잡힌 채로 청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사내의 커다란 손아귀에 잠긴 손목에서 찌르르한 여운이 퍼져왔다. 순식간에 그 여운은 혈류를 따라 가슴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별안간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 중앙에 동심원을 그리며 혈류가 커다랗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급박하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온몸을 단숨에 점유한 낯선 기운에 놀란 청아는 두근대며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자신의 심장 부근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탱탱해지면서 위로 불쑥 융기해 버린 기분이었다. 뿌리쳐야 하는데 그 어떤 강력한 기운이 그런 이성을 꼼짝 못하게 제어시키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내의 온몸에서 흐르는 압도적인 기운이 그렇게 만든다고 해야 옳겠다. 천천히 붙잡힌 팔에 다시금 찌르르한 진동이 흐르면서 지그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완력으로 힘주어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데도 강력한 흡철석처럼 청아는 사내의 이끌림에 꼼짝 못 하고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들쑥날쑥 불규칙해져 버린 자신의 숨소리 너머로 사내의 거칠어진 호흡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흘러든 그 호흡소리는 신경줄기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 찌르르한 열기를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퍼 날랐다. ‘하아.’ 자신의 이런 낯선 신체반응은 어쩌면 밤이 주는 미묘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좀 전에 벌어졌던 전연 뜻밖의 일련의 상황들. 이 사내에게 손이 잡히고도 털어낼 수 없는 이성과 왠지 그의 손길과 눈빛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감정은 아마도 이 밤 벌어진 그런 특수한 상황 탓일 것이다. ‘그래. 아마도.’ 난생 처음 겪는 생경한 느낌, 그리고 낯선 사내에 대한 알 수 없는 그 강렬한 이끌림을 청아는 그렇게 치부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수한 영겁의 시간이 흘러간 것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호흡을 고른 청아는 사내를 보았다. 빨려들 것만 같은 그의 눈빛이 저를 응시해왔다. 여전히 그에게 붙잡혀 있는 손을 보며 청아는 천천히 사내의 이끌림에 응하듯 몸을 낮췄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달빛이 흘러든 사내의 굳고 단단한 목에 매달려 있는 빛나는 물체를 본 것은. “……!” 반으로 조각난 달이었다. 청아는 차오르는 엷은 신음을 얼른 안으로 집어삼켰다. 빠른 속도로 명치끝 부근이 찌르르해지면서 뜨거운 뭔가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아왔다. 떨리는 눈빛을 한 채 청아는 천천히 반달모양의 옥에서 사내의 깎아놓은 듯한 턱으로, 다시 심연처럼 깊은 그의 눈으로 눈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그의 눈 속에 든 건 깊디깊은 심해였다. 너무도 깊어서 햇빛도 물살의 흐름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한의 깊이를 가진 거대한 늪.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 위에 수증기처럼 내려앉았다. 마찬가지로 저의 불규칙한 숨결이 그의 얼굴 위로 타올라갔다. 천천히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자락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청아는 가만히 그 손길을 음미하듯 스르르 눈을 내려감았다. 천천히 사내의 달아오른 숨결이 귓전을 간질이듯 다가왔다. 마치 비단자락을 쓰다듬듯 머리칼사이를 스쳐가는 그 손놀림이 말할 수 없이 관능적이었다. 마치 그 어떤 유인 물질을 방출해 서로를 이끄는 암수의 이끌림처럼. 그 순간 청아는 그 손길에 완벽하게 사로잡혀 버렸다. 온 신경줄기가 그의 손끝에서 융털처럼 돌기하고 있었다. 급박하게 혈류가 소용돌이쳐 오르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뢻쳐오는 쩌릿한 기운은 어느새 머리뿌리까지 타올라왔다. 청아는 어깨를 떨어가며 가물거리는 두 눈을 살며시 치켜떴다. 흐릿한 눈 속에 잠겨든 사내의 잔상 속에 기억에서 털어낼 수 없는 삽화가 스르르 망막을 스쳐갔다. 잃어버린 달의 조각을 사내가 가졌다는 이유, 사내 역시도 자신과 같은 모양의 비취옥을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이 묘한 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저 하늘의 달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듯, 어쩌면 이 사내 또한 자신과 비슷한 누구와의 약속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벌어진 청아의 입술 새로 사내의 숨 막힐 듯한 더운 호흡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이내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감촉이 점막 위를 문지르듯 겹쳐져왔다. 청아는 열기에 젖어오는 눈을 살며시 내려감았다. 사내의 뜨겁고 촉촉한 입술이 입술주름을 펴 바르듯 섬세하게 점막 위를 핥듯이 쓸어왔다. 스멀스멀 융털처럼 표피 위로 돋아나는 낯선 열기, 난생 처음 경험하는 사내의 입술. 그 느낌은 지나치게 뜨겁고 농익은 과실의 살점처럼 감미로웠다. 조금은 거칫한 듯한 사내의 서늘한 입속으로 청아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차례차례로 빨려 들어갔다. 몸이 떨리면서 청아는 핏물이 일제 급류처럼 그에게 빨려 들어간 입술 끝으로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 점막을 얼얼하게 부풀리며 맴돌던 혈류가 이번엔 사내의 단단한 흉근과 살짝 맞닿은 가슴으로 타내려왔다. 물기가 아직 채 마르지 않는 투명하고 얇은 천이 작은 마찰음을 내며 사내의 가뭇한 맨살과 맞닿았다. 살과 살끼리 맞닿은 그 감촉이 고스란히 피부 속으로 느껴져 왔다. “……!”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하고 낯선 감촉에 청아는 소스라치듯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사내의 입에서 빠져나온 더운 입김이 그의 타액으로 촉촉해진 그녀의 턱을 따라 옴팍한 그녀의 가슴골로 미끄러져갔다. 단숨에 유두 끝이 빳빳하게 치솟고 가슴이 팽팽해졌다. 찌르르해진 살갗 위로 융털이 부슬부슬 고개를 치켜들고 일어섰다. 척골을 훑고 스쳐가는 날카로운 전율에 청아는 다시금 물에 갑신 사람처럼 온 어깨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천천히 목덜미 사이를 쓸던 사내의 감각적인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어깨를 타 내려와선 떨리는 그녀의 팔을 감싸듯 거머쥐었다. 부드럽게 움켜쥐는 힘인데도 마치 오라에 묶인 것처럼 청아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단단해진 젖가슴을 커다랗게 들썩거려가며 청아는 달뜬 신음을 터뜨렸다. 흐느낌 같은 그 신음을 마치 먹어치우며 이번엔 사내의 혀가 벌어진 입속을 부드럽게 파헤치고 들어왔다. 하아, 아! 혈관 속을 점유한 낯선 열기, 온 세포가 살아 술렁대며 본능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 가슴을 꽉 조여 오는 관능의 열기를 따라 단전 아래 부근으로 뜨거운 피가 빠르게 소용돌이를 그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기면서 옷감에 올이 풀리듯 스르르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갔다. 몰려드는 열기에 기운을 잃은 청아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손으로 사내의 서늘한 옷자락을 붙잡았다. 미끈거리는 혀와 혀가 하나로 맞대졌다. 사내의 혀가 감싸 안듯 부드럽게 그녀의 혀와 입속의 여린 살점들을 핥았다. 어느새 서로의 끈끈한 점액질로 입속이 질척하게 채워졌다. 마치 아주 오래도록 그의 손길과 입술에 탐닉당하고 길들여져 온 것처럼 청아는 사내의 손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마치 물기를 흡수하는 해면처럼 사내는 뜨거운 입술과 감각적인 손길로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아찔한 관능의 세계로 그녀를 사정없이 휘몰아가고 있었다. 참으로 기묘했다. 이상했다. 처음 만난 이 낯선 사내와의 육체적 교감이 거짓말같이 조금도 어색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이다. 꼭 마법에 걸려버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