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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주의자
김도언 | 파란 | 2019년 11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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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56쪽 | 235g | 128*208*11mm
ISBN13 9791187756569
ISBN10 1187756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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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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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말과 오는 말 사이에서
멈추는 말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찾았으나
늘 실패했다.

나에게 오다가 멈춘 너의 말
너에게 가다가 멈춘 나의 말
멈칫멈칫 멈춘 말들의 미래를 상상한다.
닿지 않아서 숭고한 말들의 미래

실패할 테지만 그 말을 찾아 또 떠나야 한다.
실패는 나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
밀과 보리가 자란다.
--- 「시인의 말」중에서

1

아버지는 애매한 나이에 죽었다. 비상하는 새보다 조롱에 갇힌 새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좀 더 일찍 죽었다면 나는 새장을 짜는 기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더러운 옷을 입고 누운 채로 구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흰 구름 사이로 날아가다가 갇혀 버린 검은 새를 상상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침묵으로 일관할 때, 형의 악보에 검은 잉크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형의 여자들과 불화했다. 그들의 메모를 고의적으로 형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허술한 방문을 잠그고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청춘의 헛걸음을. 형의 이름이 검둥이 조(joe)였다고 해도, 어머니가 이슬람교도였다고 해도 나는 나에 불과하다. 나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은 나에게서 처음 목격된 흉터다.

2

그물을 빠져나간 물고기들, 신분을 알 수 없는 동료들과 철 지난 모자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장례식들, 순진한 식당과 정류장들. 내가 나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런 것들 사이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누군가 애매한 나이에 죽을 때, 남겨진 자들은 예외 없이 그릇된 판단을 한다. 식탁을 부수고 혼자서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땐 이미 방문을 잠글 수도 없다. 어느 날, 어머니가 평생 애인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의 가난이 자라 담쟁이넝쿨처럼 앙상한 무릎을 타고 머리끝에 올라선다. 그건 고결함 때문이 아니고 무심함 때문이란 걸 당신은 아는지. 서랍을 열고 알약의 색깔을 주판알처럼 맞춰 보던 밤, 이 모든 것은 나는 나에 불과하다는 신념이 사주한 풍속이었으니, 불과하고 또 불과하다. ***
--- 「불과하다」중에서

우리는 말을 했어요
모욕은 언제 가장 아름답습니까
수선화가 우리 집 옥상에 피었습니다
기차는 북쪽으로 달려갔고요
우리는 말을 했어요
기쁨은 어디에서 타락합니까
감자를 먹으면 노래를 불러 주세요
병을 감춘 늙은 개와
자부심을 갖고 싶은 빈자의 아들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냥함은 누구의 최선입니까
박해와 수난은 어느 상점의 진열품입니까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세요
우리는 말을 했어요
길고 긴 침묵의 분별력에 대해
지금 지나가는 사람에게
힘껏 사랑한다고 말하는
저 깊고 우아한 경솔함에 대해 ***
--- 「우아한 경솔함」중에서

섹스보다 안녕, 멀리서 담배 연기처럼 흔들리는 당신이 내게 말했다. 내일 아침엔 배가 뜰 거야. 우수와 농담을 다 버리고 이곳을 떠나자. 망명지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서러운 짐승의 영은 숲으로 돌아가라. 섹스보다 안녕, 초원에서 추는 왈츠의 리듬과 절지동물들의 이름을 외울 것, 우리의 연애는 거기에서 시작되었지. 습관적으로 접두사를 사용하고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을 때 당신은 완성된다. 안녕의 상상력을 흉내 낼 수 없는 섹스를 내버려 두자. 미지는 미지에서 오는 것, 섹스보다 안녕, 멀리서 바다처럼 흔들리는 당신이 내게 말했다. 화석처럼 굳어 있는 사랑을 만지고 마침내 우리는 헤어지자. 당신은 나를 아는 최후의 사람, 우리는 모두 섹스보다 안녕. 당신은 아는가, 우리의 섹스는 우리가 통과했던 가난처럼 귀여웠다. 당신이 흔들린다, 당신을 흔든다. ***
--- 「섹스보다 안녕」중에서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한국 문단에서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문인들로 윤후명, 이응준, 장정일, 이장욱 같은 분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간 무게 있는 소설가로 활동해 온 김도언 작가가 시인으로 등단하고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그 또한 시인을 겸하게 됐다. 그는 그동안 여러 지면이나 경로를 통해 권태주의자임을 자임해 왔지만, 그의 글을 꾸준히 읽어 온 나로서는 그가 오히려 허무를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서기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의 허무는 “아버지는 애매한 나이에 죽었다. 비상하는 새보다 조롱에 갇힌 새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불과하다」)와 같은 허무이겠지만, “만성피로자들, 각종 팀장들, 장애자들, 감기 환자들, 열등한 후보 선수들. 나에게서 내가 아닌 그림자를 기다리는 동안, 오후 두 시 삼십 분이 지나간다”(「실존에 대하여」)에서처럼 시간 속에 사라지는 군상에게 건조한 시선을 던짐으로써 ‘쓰는 자’의 정체성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시집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군더더기 없는 언어로 낯설고 기이하면서도 강렬한 메타포들을 획득하고 있어 반갑다. 전 지구적 삶의 단면을 통해 인간의 삶을 적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의 문장들, 예컨대 “덥고 가난한 실론 섬에서 일하러 우리나라에 온 젊은 사내가 눈 오는 길을 걷는다. 하얀 눈 속을 매 맞은, 검은 자가 지나간다”(「눈의 백일몽」)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이번 시집에서 그는 소설과 시의 경계를 벗어난 어떤 개성적인 장르를 창출하고 있다.
- 성윤석 (시인)
자네, 지금 그가 향한 방향이 어딘지 묻는 겐가?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내 짐작대로라면, 그의 발걸음이 향한 쪽은 아마도 “지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일 걸세. 그리고 언젠가 시인이 문득 가던 길을 멈춰 뒤돌아서서 본다면, 우리가 앉아 있는 이쪽이 그에게는 “저쪽”이 되겠지. 이쪽과 저쪽이라는 경계는 실로 모호할 따름이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법한 더욱 무시무시한 ‘정신의 지옥’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디에나 있다는 점이지. 그리고 그 ‘지옥’은 자네가 떠올릴 법한 풍경과 전혀 다를 것이네. 그곳은 오히려 편안하고, 무엇이든 매끄럽게 말들을 주고받는 곳이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축복하며 온갖 아름다운 말들만 지껄이는 곳! 이 얼마나 “능률”적인 안온함이란 말인가! 그런데 왜 그곳이 지옥이냐고? 그곳의 말들에는 의미의 ‘간극’이 없기 때문이야. 일말의 긴장조차 발생하지 않으니, 어떠한 ‘죽음’도 일어나지 않는다네. 천국의 영생이 축복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부디 거두게나.
- 정재훈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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