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이 설치되기 이전에 당과 신라, 일본 등 3국간의 교역은 공무역 쇠퇴로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문종 원년(827)에 번진(藩鎭)의 발호로 문란해진 무역질서를 바로잡기 위 해 각 국 선박의 안전 항해를 보장하는 역사상 최초의 '항해조례'를 채택했다. 김성호 전 농촌경제연구 원 수석연구위원에 따르면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소재한 대당치청절도사에 새로 부임한 양번사 강지 목이 '교통지사'라는 외교문서를 만들어 신라, 발해, 일본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 칙령은 항해 도중 태 풍 등으로 어려운 일을 당할 경우 관련국들은 인도주의적인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결 과적으로 신라, 일본, 발해 등의 민간 교역을 활성화시키는데 결정적인 기반이 됐다.
또 806년에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단절했던 신라와 일본은 청해진이 설치된 지 햇수로 4년 만에 신라 상인에 대한 무역 규정을 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조정은 831년 태정관(太政官:율령관제에 의한 행정 의 최고기관으로 8성 이하를 통할하여 정무를 처리했음)을 통해 다이자후(大宰府)에 관부(官符)를 내려 신라 상인에 대한 무역규정을 하달했다. 그 지시에 따르면 신라 상인이 도착하면 먼저 정부 수요에 맞 는 것을 선별하여 중앙에 보내고 필요가 없는 것은 다이자후가 점검해서 일반 평민들에게 교역을 허락 하되 공정가격에 거래되도록 관리·감독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양국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면서 민간 교역이 암묵적으로 이뤄졌음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청해진이 해상 군사기지로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 이 아니라 신라의 무역전진기지 또는 중개 무역항으로서의 위상을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청해진이 대외개방의 전진기지였다는 사실은 신라와 일본 조정이 청해진을 설치한 지 7년 만에 해외로 부터 수입되는 사치품을 규제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신라 흥덕왕은 834년에 동남아 지역의 특산물 인 '남해박래품'의 사용을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는 청해진이 설치되면서 해외로부터 호화 사치품 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는 사실이다. 외래품 수입규제는 일본 조정도 마찬가지였다.
신라 조정과 장보고 대사가 무역 진흥을 위해 청해진을 설치했다면 과연 당시 봉건국가체제하에서 민 간무역을 할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었을까. 적어도 무역 진흥을 위해 민간무역을 벌였다면 먼저 수출 기반 산업과 상업자본이 발달되어 있어야 하고 외래품을 소비할 수 있는 수요자가 있어야 한다. 또한 민간무역을 구가할 수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시스템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할 당시는 오늘날처럼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역 진흥을 추진할 만큼 여러 분야가 발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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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새천년 한민족의 미래를 여는 사표로 장보고 청해진 대사를 삼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장보고 시대(828-841)와 90년대 한국경제가 처해 있는 대내외적 상황이 비슷한 구조(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장보고 시대와 오늘날 한국경제는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공통점을 안고 있다.
둘째, 천년 전 장보고 시대에도 한반도는 신라, 발해로 나눠진 남북조시대였다면 지금은 남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다.
셋째, 장보고 시대에는 중앙귀족(기득권세력)과 지방호족(신흥신진세력)이 대립됐다면 지금은 보수와 개혁세력간의 갈등이 야기되고 있다.
넷째, 장보고 시대에는 당(唐)과 일본에 수십만 명 규모의 재외 신라인이 있었다면 지금은 전세계 1백42개국에 재외동포 5백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 '장보고, 새 천년 한민족의 師表로 삼아야 하는 이유' 중에서
경제 우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제 장보고 대사의 상인정신과 철학, 경제 마인드를 배워야 한다. 따라서 가정경제는 물론 국가경제 발전에 도움을 삼아야 한다. 세계시장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장보고의 상인정신을 체득해야한다.
--- p.증보판을 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