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귀부인은 옷감의 품질을 가늠하듯 연분홍색 손가락으로 하늘색 캐시미어 카디건을 만지작거렸지만 시선은 내게 꽂혀 있었다. 그녀가 품질을 가늠하는 대상은 나였다. 마침내 귀부인이 부티크 점장인 매리사에게 물었다. “쟤도 파는 건가?” 어린애가 헐떡이는 듯한 말투였다. 무심한 듯 조용히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큼지막하고 먹음직스러운 고칼로리 크림 케이크 조각에 돈을 펑펑 쓸 의향이 엿보였다. 드메인에서 가장 잘나가는 엘리트 중개인 매리사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는 의류뿐만 아니라 사람도 판다. 우리도 사람으로 취급될 수 있다면 말이다. 여기 드메인에 사는 인간들은 우리를 ‘클론’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를 ‘엘리지아’라고 부른다. 내가 출시될 때 루사디 박사님이 나는 나를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과 몇 주 전에 출시됐다. 하지만 나는 열여섯 살 소녀다. 내 모체, 그러니까 내 시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앞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를 만들기 위해 그 소녀는 죽어야 했으니까. --- pp.5-6
물속에 있자니 한 가지가 더 확실해졌다. 나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는 것. 나는 예전에도 이렇게 젊은 남자 주변을 헤엄치며 놀린 적이 있다. 이제 그 남자의 길고 강인한 다리가 보였다. 근육의 크기와 형태로 보아 금빛 털이 난 그 다리의 주인은 수영 선수였다. 그것도 우람한.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엉뚱한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떨쳐 내려고 아이반의 다리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팔을 저어 동굴 안 풀장으로 통하는 수중 터널을 향해 헤엄쳤다. 하지만 물속의 질주는 또 다른 유령을 불러냈다. 우람한 수영 선수의 다리와 함께 어떤 얼굴이 나타났다. 피부가 매끈한 젊은 남자였다. 황금색 피부, 금발 머리, 청록색 눈동자, 미적으로 완벽한 근육질의 몸은 캘리포니아 해변의 전설적인 서핑 챔피언을 연상시켰다. 그의 깊고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마치 나를 알아보는 것처럼, 나를 초대하는 것처럼. 도톰한 그의 입술이 떨어지면서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지!’ 그를 향한 그리움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를 만져야 한다. 당장. 나는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를 만져야 해. 만져야 해. 만져야 해. 하지만 나는 흥분한 나머지 숨을 다급히 몰아쉬다가 물을 들이켜고 말았다. --- pp.41-42
나는 도톰한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꿀처럼 감미로운 입술이 내 옆에 있다. 용기를 낸다면 만질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 이 아름다운 10대 청년은 몸매가 탄탄한 수중 유령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타힐은 진짜다. ‘나는 네 거야, 지.’ 내 시조와 그 물의 신에게 소유란 다른 개념이었을 것이다. 여기 드메인에서 클론 일꾼을 소유하는 개념과는 다르다. 나도 그들이 느낀 열정을 느끼고 싶다. 재생된 남의 기억이 아니라 내 경험을 갖고 싶다. 재생된 그 기억은 지의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전 세계를 폐허로 만든 ‘물의 전쟁’ 이후 부유한 권력자들은 ‘드메인’이라는 낙원을 만든다. 공기는 언제나 고급 산소로 채워지며, 자줏빛 바다에서는 잔잔한 파도가 아름답게 물결친다. 그리고 순종적이고 아름다운 클론들이 시중을 든다. 시험적으로 출시된 10대 클론 엘리지아는 클론들 중에서도 빼어난 외모와 귀여운 행동으로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지아는 환영을 본다. 바로 자신의 모체인 죽은 소녀가 사랑했던 남자. 전생을 기억하는 클론은 없다. 불량품이다. 이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환영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