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고향’이었다. 고리타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책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잠자리에 드러누워서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우선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 친근하지 않는가. 한참 책을 읽다가도 키릴 이바노비치 브론스키 백작의 아들 알렉세이 키릴리로비치 브론스키(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라든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같은 이름 때문에 몇 번이고 책장을 덮은 기억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또 그들이 걸어가는 거리가 크게 낯설지 않았고, 그들이 나누는 말과 이야기가 크게 귀에 설지 않았다. 물론 백 년의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통째로 낯설었고, 통째로 귀에 설었다. 그래도 어느새 나는 그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책머리에」중에서
“어르신은 어디 가셨나?”
“어디 출입하셨어.”
“어딜 가셨을까?”
“모르지.”
“이놈, 어린놈이 대낮부터 술이 취해서 학교도 가지 않고, 쯧쯧.”
“응, 대낮이라니? 술은 밤에만 먹는 거야?”
정 교관도 어지간한 사람이었지만 더는 한 방에 있을 배짱이 없었다. 그래서 “에이, 고연 놈!” 하며 일어서자, 영복이는 거의 드러누울 자세로 말했다.
“여보게, 히로 한 개만 주고 가게.”
---「금주패를 차다_변영로」중에서
어느 날 요한이 말했다.
“난 커서 문학을 전공할 거야.”
그 말에 동인은 당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퍼뜩 도쿄에 가게 되었다고 자랑하던 평양 시절의 요한이 떠올랐다. 아니, 그때보다 열 배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문학’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해서였다. 자존심 때문에 그게 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법률학을 배우면 장차 변호사나 판검사가 될 것이다. 의학은 분명 의사가 된다. 공학은 기술자가 된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학문인가? 무엇을 배우고, 그걸 배우면 나중에 무엇을 하는 것인지, 동인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야말로 백지상태였다. 그럼에도 분했다. 약이 올랐다. 부끄러웠다. 요한에게 불쾌했고, 자신에게 화가 났다.
---「질투는 나의 힘_김동인」중에서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명순, 그녀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류 작가’였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여류 작가들은 오직 (‘남류 작가’가 아니라) ‘작가’들이 지배하는 문단의 재미있는 ‘스캔들’로서만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것을 거부할 때, 그들에게는 참혹한 낙인이 찍힐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24년 서른도 채 안 된 나이로 이미 이렇게 ‘유언’을 대신하는 시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류’였다_김명순」중에서
그녀는 임신 소식을 처음 알았을 때 기쁘기는커녕 자기들의 책임을 면하려고 시집가라고 강권하던 형제들의 소위가 괘씸했다. 나아가 감언이설로 “너 아니면 죽겠다” 하여 결국 제 성욕을 채우던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아이를 낳는 순간 그간 자유롭게 품었던 꿈이 다 사라질 것은 더욱 두려웠다. 억울했다. 또 자신이 ‘사람’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는지도 스스로 의심스러웠다. 아이가 배 속에 있는 동안 좋은 태교는 커녕 온갖 못된 생각만 잔뜩 했으니 아이가 제대로 꼴을 갖추고 나올지도 불안했다.
---「조선을 흔든 이혼 고백장_나혜석」중에서
어떤 선사가 명종命終할 때 제자를 불러 가로되,
“누워 죽은 사람은 있지만 앉아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앉아 죽은 사람은 있지만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바로 서서 죽은 사람은 있으려니와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없습니다. 인류가 생긴 지가 몇만 년인지 모르지만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선사가 이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서서 죽으니라.
이는 죽을 때까지도 남이 하는 노릇을 안 하는 괴물이라, 괴물은 괴물이 될지언정 노예는 아니 된다. 하도 뇌동부화를 좋아하는 사회니 괴물이라도 보았으면 하니라.
---「그 봄은 괴물과 함께 오리라_신채호」중에서
홍지동 산장을 방문했던 벗들은 언제부턴가 그의 서재에서 커다란 일장기가 걸려 있던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하루는 아내 허영숙이 기가 막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나.
“세상 사람들이 이광수를 친일파라고 하지 않소. 그럴 바에야 뚜렷이 표적을 내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소. 당신이나 나나 우리 아이들이나 모두 한국 사람이 고생하는 것이 저것 때문이 아니겠소. 매일 저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울화가 다소 풀리는 거요. 원수진 사람도 늘 곁에 있으면 미운 정이라도 드는 법이오.”
---「마침내 집을 팔다_이광수」중에서
“지하실에서 관을, 떡 뚜껑을 여니깐 인제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하얘지더니 코에서 핏물이 촤르륵 쏟아지대. 죽은 사람이. 그래 ‘할배, 뒷일은 내가 다 처리할게, 눈감고 곱게 가’ 이래 놓고, 신발두 없어, 안경두 없고, 있는 거라고는 그 시집 한 권밖에는 없어. 그리고 만년필 한 개하고. 그걸 날 내주더라고.”
---「그가 없이는 부끄러움이 크리라_이육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