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울창한 깊은 골짜기에 음산한 바람이 불어쳐도 대낮의 산속은 쇠돌에게는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아침 해가 솟아오름과 동시에 쇠돌의 생활은 숲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봄이면 산나물을 꺾고 여름이면 산딸기와 칡뿌리를 캔다. 가을에 접어들면 숨 쉴 틈도 없이 더 바쁘다. 머루와 다래를 따랴, 돌감과 도토리를 주우랴, 송이를 캐랴, 나무를 하랴… 등등의 일들로 그의 작은 몸은 항상 피곤하다. 쇠돌이는 제 이름자도 쓸 줄 모르며 노래도 부를 줄 모른다. 달짝지근한 다래를 한입 가득 물고 흥겨워지면 놈은 ‘찌찌배배, 왱왱…’ 하는 소리를 곧잘 지른다. 아니면 ‘우우… 쾍쾍’ 하는 짐승 울음을 발하기도 한다. 산에서 나서 아홉 해를 산에서 자란 쇠돌은 산이 고향이고 산이 집이다. 다람쥐와 새들과 친구하는 흡사 귀여운 산짐승 같았다.
--- 「산영山影」중에서

싸늘한 밤공기와 달빛이 좋았다. 슬픔과 외로움이 산더미마냥 가슴에 밀려들며 콧속이 찡해졌다. 아버지와 땅을 일구고 다시 살고 싶었다. 조와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었어도 그땐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았던가. 봄이면 산나물과 진달래를 꺾고 여름이면 산딸기, 가을이면 머루 다래 송이를 따러 온통 산에서 뒹굴며 깔깔거리지 않았던가. 온갖 짐승과 새들이 득실거렸어도 그녀의 흉한 얼굴이나 반점을 탓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산꽃과 산새들과 산과일 속에서 그녀는 불행을 몰랐다. 첩첩산속 움막에서 활달하고 어여쁘기만 했던 것이다. 또점은 사람들이 무섭고 싫었다. 술청에 드나드는 남정네와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과 홍천댁과 덕호가 무섭고 역겨웠다. 산이 지척에 있어도 집안 일에 몰려 오르지 못했다. 관대함과 자애로움과 침묵으로 깊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산속으로 다시 깊숙이 파묻히고 싶었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그렇게 혼자 살고 싶었다.
--- 「山가시내」중에서

망부석처럼 규희는 꼿꼿이 서 있었다. 비로소 그녀는 선명히 떠오르는 한가닥의 생각을 잡는다. 자신의 길을 드디어 찾아낸 그녀는, 어서 짐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칠여 년을 군림하고 휘청거린 한 교수의 성에서 물찬 제비 같은 날갯짓으로 미련 없이 날아가는 것이다. 참으로 쉽사리 용단은 내려졌다. 누적되어 가끔씩 피를 말리던 회의와 자기혐오감이 광란하듯 또다시 춤을 추었다.
--- 「배꽃」중에서

쇠봉이 지리산 대원사를 찾아든 것은 열네 살 적. 사람들은 해방이 되었다고 희희낙락 모두들 들떠 흥분했으나 쇠봉은 해방이 무엇인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다만, 동네에서 효험없는 서낭나무를 제거하고 무허가의 당집을 없앤다는 소문이 떠돌아 그는 아홉 살적 냇가에서 머리를 밀어준 중산리 무영사의 원주스님을 찾아갔다. 그러나 스님은 강원도 운지사로 떠나고 없었고, 무영사의 주지승은 쇠봉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쇠봉의 눈빛에 야생의 기운이 뻗쳐있어 좋은 연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이유였다.
--- 「이승의 한 생生」중에서

홍점 노인은 당신 인생을 팔자 늘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루 한 끼를 먹기 힘들어 신집 귀신이 먹던 밥을 얻어먹고, 집벽의 황토를 긁어먹고, 무명옷 한 벌로 사철을 지내고(등짝 허리께는 아기의 오줌으로 절어 천이 썩기까지 했다), 두 번 시집을 가서 피멍이 드는 마음 고생과 상머슴처럼 뼈 빠지게 일만 하는 것으로 젊은 인생 다 보냈지만, 바로 지금의 편안함을 누리려고 그런 힘든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장수하여 대접받고 사는, 예전에 비해 사뭇 극락 같은 노후의 삶을 누리려고 그리도 힘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 「홍점 노인」중에서

“그래… 이제, 비로소 3모작의 시작이야. 외적 형상이 어떠하든 이제부터 왕성한 삶을 살 거란 말이지. 즐길 거란 말이지. 이렇듯 건강하게 살아있음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데,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성취 때마다 벅차오르는 희열은 육체적 변화에 비할 바가 아니라구, 일의 과정도 고통도 즐거움의 하나이거늘. 지극히 어리석고 피부적인 감성은 이제 털어내는 거야, 만고에 쓸모없는 소모성 감정일 뿐이니까. 젊음으로 윤기 흐르던 외형적 아름다움의 세월은 이미 비껴갔거늘, 섭리인 것을.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지. 육체의 쇠락함을, 전신의 기능이 노쇠하여 역동적이지 못하다 해도, 기우는 그 모습 또한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이지. 그래, 아직은 퍼렇게 살아있는 내면으로 추락의 모습을 훈장이듯 당당하게 과시하는 거야, 위축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지, 대자연의 섭리는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가장 아름다운 과정의 작품이니까… 바로 진정한 자유의 상태가 되는 길일 터이니…”
--- 「봄날은 간다」중에서

다음 날, 노인은 어깨를 처뜨린 채 중환자실에서 남편의 얼굴을 뚫어지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지없이 선량하고 낙천적이던 그러나 어구찬 데가 없어 곧잘 당하기도 하던 영감이, 당신의 힘으로 어쩌지도 못한 채 나무토막처럼 놓여져 있는 모습에, 새삼 허망함과 심장께가 찢어지듯 미어져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다. 영악한 사람에게 당하고 두 손 놓은 채 아내만 쳐다보던 생전의 그 모습처럼, 영감은 여전히 당신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정도만이라도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면 50년 가까운 그와의 사이에 불편하고 미진했던, 아니 오로지 그만을 위한 삶을 살아줄 수 있을 것 같은 간절한 마음이 된다.
--- 「존엄하게 죽을 권리」중에서

백년 인생에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반백년을 살았다면 혹여 미련하고 우직스러웠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최소한 두세 등분으로 나누어 또 다른 일을 섭렵하고 나름 만족하며 여한 없는 삶을 보낸 이를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업종에 백년을 완벽하게 투신하고도 끝내 쾌감을 얻지 못하는 인생도, 의중에 꽉 찬 또 다른 꿈을 백년이 짧아 한으로 품고 스러지는 인생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각자에게 주어진 억만금 같은 단 한 번의 삶을, 욕심 없이 생명을 유지할 만큼만 일을 하다 행복한 마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또다른 많은 보통 인생들처럼,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이며 평가이지 싶다.
새삼 거론함은, 한 가지 업종으로 50년을 넘어 살아오면서 전기한 어느 쪽에 자신을 세워볼 것인가 생각해보다가 떠올려본 상념이다. 어떤 삶 쪽으로도 자신을 통째로 밀어 앉히기엔 해당이 되는 듯 아닌 듯하여 더 깊은 사유와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다만 50년이란 세월에 점을 한번 찍고 싶었다.
벌어먹느라 평생 현장을 뛰면서 거기다 골수에 들러붙은 글귀신을 붙잡고 50여 년을 골즙 빼며 살아온 지난 삶이 소중해서다.

작가 김지연은 초기에는 ‘원초적 관능’ 혹은 ‘자연 속의 관능’ 문제를 집요하게 탐색했지만, 후기에 와서 그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리얼리스트의 ‘펜’을 쥐고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병원을 배경으로 흑색병동, 시험관 아기 및 임종 환자들의 장기 이식 문제를 둘러싼 윤리적 문제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의 소설세계는 이렇게 전후기로 나누어 분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파시즘적인 에로스와 기계적인 생명과학이 인간가치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비극적 현상을 자연주의적 차원에서 고발하는 주제로서 전체적인 통일성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의 소설의 어느 작품을 읽어도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치열한 갈등으로 인한 황폐한 풍경들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일생을 두고 탐색한 ‘선과 악’으로 구성된 자연의 힘을 인간적 원리로 결합해서 변형 또는 승화시키지 못하면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