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서로가 찔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로의 가시를 뒤섞을 수 있는 공간을 공유했거나, 찔리는 일이 있더라도 양해를 하고 넘어갔지만, 요즘은 각자의 가시 길이도 더욱 길어졌을뿐더러 아예 자신의 가시 안으로 다른 결의 가시들을 뒤섞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서로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불쾌의 자극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가시 길이에 타인의 가시 길이를 더한 만큼으로 멀어진다. --- p.27
그 지위가 지니는 상징성을 대변하는 행위, 즉 지시 혹은 컨펌에 대한 과잉의 집착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을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던가. 그게 왜 문제가 될까 싶을 정도로 사소한 사안을 지적하며 결재를 잘 안 해주는, 해주더라도 기어이 충고 한마디를 덧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상사들이 완벽주의 성향인 것도 아니다. 그저 그 몽니의 행위 자체가 목적이라는 사실은, 일관성이 없는 그의 결재 기준이 증명한다. 자신에게 내재된 성향과 반대되는 이미지를 욕망하는 인간상일수록 사소한 것에 화를 내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하다. --- p.63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에서, 장애를 지닌 조제를 사랑한 남자는 마지막엔 결국 조제를 떠나간다. 그런데 조제가 짊어지고 있던 불행이 이 사랑의 원인인 것도, 그렇다고 결과인 것도 아니었다. 어떤 연민에서가 아닌 그냥 한 여자로서 사랑받은 것뿐이고, 흔한 연인들의 이별처럼 헤어지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도 기꺼이 남자를 떠나보내 줄 수 있었다. 애초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도’로 시작되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 접사는 제3자들의 관점일 뿐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데에는 ‘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서로에게만 적용되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었다. --- p.76
한 가지 흥미로운 통계, 고학력 집단 중에 싸이코패스들이 은근히 많단다. 부조리한 정권의 실세였던 엘리트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납득이 되는 데이터가 아닌가? 부모도 바라고 선생들도 관리하기 편한, 모범생들의 대다수는 나중에 좋은 직업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사회적 욕망에만 치여 자라나는 이들은 배워야 할 것과 느껴야 할 것들을 배운 적도 느껴본 적도 없다. 그런 공감능력이 없어 그저 이해관계로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웃긴 건, 아니 웃기지도 않는 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게 살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그러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그래서 그런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상류사회가 서민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할 테고…. --- p.96
심리학은 크게 행동주의와 인지이론, 정신분석학으로 나뉜다. 행동주의는 인간의 습성이 동물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실험을 시행하고, 얻어낸 데이터들의 평균치로 이론화를 하는 방식이다. 이 심리학은 주로 미국의 실용주의 논리를 대변하며, 미국이 종주국이기도 한 자기계발서들에 많이 인용이 된다. 문제는 특정 이론이 모든 이에게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평균의 가치일망정 보편의 가치는 아니며, 개개인의 삶이란 차라리 그 평균으로부터 떨어진 편차 자체이다. 또한 인간의 삶이 이론으로 일반화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한 문제점이 지적되는 영역이다.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자들은 ‘가짜 과학’이라고 일컬으면서 비판했던 심리학이다. --- p.174
국립국어원의 기준에서는 ‘잘산다’가 ‘잘나다’와 같은 맥락인가 보다. 수식어와 술어가 묶여 하나의 단어가 되는…. 오랜만에 연락을 해온 친구가 묻는 ‘잘 살고 있냐?’ 인사에서 ‘잘 산다’가‘잘산다’의 의미는 아닐 터, 그러나 때로 ‘잘 산다’와 ‘잘산다’의 구분이 무의미하기도 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에, 문자로 대답하지 않는 한, '잘 산다'와 '잘산다'의 띄어쓰기를 뭉개며 말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에…. 잘 살고 싶기도 하고, 잘살고 싶기도 하고….
--- 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