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시행된 지 10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현실은 애초에 기대했던 바와 거리가 멀기만 하다. 법을 통해 내부고발자를 보호한 사례도 있지만, 내부고발자가 적절하고 충분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 역시 끊임없이 들려온다. …… 사회 구성원 역시 이들을 진정으로 끌어안는 학습과 노력이 부족하다. …… 국가의 품격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일류 국가를 꿈꾼다면, 구성원이 먼저 사회 전체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학습이 필요하다. 내부고발에 대한 법적 보호 수준이나 사회의 태도 변화가 부족한 만큼, 내부고발자도 스스로 보호받고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내부고발은 의로운 일이지만, 내부고발자는 자신의 도전과 성취에 앞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준비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의 집필은 필자들의 이러한 인식과 의도, 소망에 기초한 것이다.
--- p.10
육군 9사단 이지문 중위는 1992년 3월 22일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군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공개투표, 대리투표와 여당 지지 정신교육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국방부는 이 중위를 근무지역 무단이탈로 구속했다. 또한 해당 부대 장교와 사병 5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 중위의 증언이 허위였다고 발표했다. 이 중위가 좌익 운동 세력과 연계되어 있다며 고발 동기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그러나 현역 군인 200여 명이 공선협과 언론사 등에 익명으로 군 부재자투표 부정에 관해 제보하고, 특히 통신사령부의 이 모 일병이 추가로 관련 사실을 고발하자, 국방부는 여당 지지 정신교육과 대리투표 행위가 실제 몇몇 부대에서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중위는 그 후 기소유예로 석방되고 이등병으로 파면 조치되었으나, 3년간 법정투쟁을 벌이는 동안 전역 군인들이 이 중위의 고발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해줌으로써 1995년 2월 대법원으로부터 파면 처분 취소 확정 판결을 받아 중위 신분을 회복하고 명예전역을 했다. 그의 고발 이후 국방부는 투표제도를 개선했다. 군 부재자투표 장소를 영외로 바꾸고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부터 이를 시행하면서 군 부정선거 시비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 p.21~22
이재일 씨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당시 연구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출장비와 연구비를 횡령한 사실을 신고했다. 이 씨에 따르면, 해당 연구원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출장 계획을 만들거나 연구 계획을 위조하여 기안하고 금액을 타내는 수법으로 횡령한 금액이 개인카드 사용, PDA 구입 등의 비용으로 유용되었다. 이 씨는 이러한 부당한 행위에 동조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부했으며, 이에 대한 사례를 수집해 내부감사를 의뢰했으나, 감사팀은 공문을 통해 오히려 청구인이 이 씨임을 공개하여 신분을 노출시켰다. 이후 공개적인 집단 따돌림, 언어폭력 및 상해 위협, 허위 사실 유포 등의 피해로 괴로워하다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국가청렴위원회(현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했다. 국가청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2004년 10월부터 21개월 동안 직원 318명이 모두 1,235건의 국내 출장을 거짓으로 신고하여 출장비 4억 8,000여 만 원을 횡령한 것을 확인했다. 이 씨는 2006년 8월 해직되었으나, 그녀의 제보를 계기로 공무원 여비 규정은 개선되었다.
--- p.29~30
내부고발을 하더라도 불이익을 피할 수는 없을까? 최선의 방법은 익명으로 하는 것이다. 외부로 공개하는 대신 내부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도 있다. 조직 내 핫라인을 이용하거나 감사실에 익명으로 제보할 수도 있고, 회의 석상에서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가장 믿을 만하며 자신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들어줄 내부 인사에게 비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모든 방법 가운데 가장 안전한 방법은 역시 ‘익명’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본인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하는 것에 비해 효과는 크게 낮다. 어떻게 보면 익명의 신고나 폭로라고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 p.82
법적 보호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사실 내부고발자가 법적 보호를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나 받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현재의 법적 보호를 통해 해고를 막아서 내부고발자가 실직을 당하지 않더라도 따돌림과 비난, 과도한 감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조직 내에서 차별, 동료들의 냉대와 무시 등을 당할 때 과연 얼마나 보호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는 것만 못할지도 모른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고용관계 유지의 편익보다 몇 배나 더 크고, 품위 유지를 어렵게 하며, 추가적인 갈등을 증폭하거나 원망만을 키울 수 있다. 내부고발자로서 보호를 받아도 일단 사회심리적 피해가 발생하면, 고발하기 전으로 복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 p.100
“저는 내부고발을 하고 나서야 전문가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전문가들을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잘 준비하고 처리했다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전문가들을 내부고발을 하기 전에 알게 되었다면 이렇게 긴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싸움이 길어진다고 해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덜했을 것 같습니다. 저를 비롯한 사람들 대부분은 법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을 알고 있지 못하거나 설령 알고 있다 해도 100%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법에 대한 이해, 향후 처리에 대한 계획 등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조언이 무엇보다 필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 p.115
사무실의 경리나 서무 직원 혹은 타 부서의 직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들은 조직의 비리에 대해 깊은 내막을 알고 있을 수 있다. 또 언제든지 지지 세력이 되어 정보 제공 등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동료들은 신고자를 부담스러워하며 피하거나 멀리한다. 내부고발자는 때로는 배신자, 믿을 수 없는 사람, 문제가 있는 사람, 위험 인물 또는 요주의 인물 등으로 분류되고, 배척당하기 쉽다. 동료들과의 좋은 관계는 이러한 위험을 막는 방법이다. 내부 비리 폭로의 의도나 효과를 무력화하려는 조직의 보복도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일종의 본보기나 경고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p.131
내부고발자가 받아야 할 것은 고통과 스트레스가 아니라 박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소명을 부여받은 공직자가 국민을 위해 증언해야 하는 자리에서 진실을 말할지 숨길지를 고민해야 한다면, 그리고 민주국가에서 주권자인 시민 개개인이 사회를 위해 나서는 것에 대해서 불이익을 전제해야 한다면, 이것은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국가가 그들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 경우 그들이 국가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 누구든 주권자로서,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다.
--- p.256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내부고발자의 사회적 기여, 중요성이 아직도 미흡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안타까움, 그 의로운 도전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언급하고자 했다. 내부고발이 누구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해야 할 일이 결코 아님을 함께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고, 무엇보다 우리가 더 안전하고 편안하고 자유롭고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 누군가 부패에 맞서고 곤경에 처하는 일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막연히 신고하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는 점을 알려, 혹시라도 누군가 선의 의지 하나만 믿고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