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애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종이처럼 쌓여 책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고 어른이 되었다. 나는 그 과정 내내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애의 이야기를 적었다. 이 이야기 안에서 아무도 행복을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세상을 견디는 힘이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추억은, 어떤 기록은 견디는 힘이 된다.
--- p.21
좋아하는 사람이 비싼 밥을 사주거나, 내가 한두 번씩 쓰다듬기만 하고 망설이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사주면, 그게 애정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하늘 끝까지 붕 뜨면서도, 내가 상대에게 무얼 해줄 수 있는지 고민했다. 할 수 있는 게 애정의 표현뿐이라는 생각이 들면 ‘보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감당하며 누군가와 오래 보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는 연애인데, 아무래도 나는 연애에 서투르니까 내가 내뱉었던 좋아한다는 말이 꾸밈없는 애정처럼 다가가지 않았을 것 같아 조금은 아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 p.76~77
매일매일 다짐하지만 매일매일 불안한 삶을 산다.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감에 떠는 날 보며 “분명히 잘될 거야. 네 앞날에 분명 무언가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그 말이 참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신뢰가, 내가 고군분투한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만든 것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 p.96~97
마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 어차피 떠올릴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다. 젖는 정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일이다. 괜한 자존심을 부리는 일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해도 생각이 나는 사람은 그냥 생각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비 그친 뒤 우산처럼, 물기가 마를 때까지 마음을 접지 않고 펼쳐두는 게 맞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매력 없는 사람이 되더라도. 자신한테 조금 못된 사람이 되더라도.
--- p.211
목적이 없어도 추억은 쌓인다. 왠지 여행 같은 시절을 살았던 것만 같다. 하는 것이라고는 별게 없던 날들과 그런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돈 없이, 하는 것 없이 존재하는 관계들이 여전히 소중해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뭐할까? 우리 그냥 조금 걸을까? 아무데나’라 말하는 내게 ‘나 걷는 거 좋아해’ 하고 말해주는 사람을 닮는 일같이.
--- p.243
좋아한 게 아니라고는 생각 못하겠다. 눈을 보면 떨렸고, 밤에 달이라도 올려다보면 분명히 더 예쁘게 보였다고 생각해. 다만 당신은 언젠가 더 좋은 사람, 더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그런 생각을 했던 거지. 여전히 난 섭섭하고, 그랬을 당신이 안쓰럽고,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져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서로 보고 살았으면 싶고.
--- p.258
자꾸만 어깨를 기대고 싶은 걸 참았다.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볼 때면 영화 속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만큼, 자꾸만 기우는 어깨를 바로잡는 데 신경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가서 닿고 싶은 마음이 3도씩 그 사람에게로 기우는 건 내가 막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미 바닥에 닿았을 마음을 오뚝이처럼 당기느라 늘 무거운 돌멩이 하나를 몸속에 지니고 다녔다.
--- p.262
당신이 가장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가 ‘당신’을 ‘우리’로 바꿔 적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게 그게 맞을까 걱정이 되어서. 거짓말쟁이가 되기는 싫어서.
모든 이타심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나도 함께 행복하고 싶다. 그의 행복을 정말로 바라지만 나 없이 말고, 나 있이였으면 좋겠다.
--- p.273
어떤 선물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보석과 마음과 편지입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에요. 보석 같은 마음과, 마음 같은 편지와, 보석함에서 반짝이는 우리들의 추억입니다.
보석과 마음과 편지. 그게 나의 선물이에요.
---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