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
1920년대 중반의 이러한 정세 속에서 자주성에 입각한 참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역사적 사건은 바로‘ ㅌㆍㄷ’ 즉‘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이다.‘ ㅌㆍㄷ’은 1926년 10월 17일 중국 땅 만주의 길림성 화전에서 결성되었다. 길림에서 소년운동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던 김일성은 계영춘, 최창걸, 김원우, 박소심, 한영애, 현균, 김혁, 차광수, 최천, 문시선 등을 만나 좌ㆍ우익의 소아병적 경향을 배제하고‘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
‘ㅌㆍㄷ’은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면서 당면하게는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와 조선의 해방 성취를 자기 강령으로 내세웠다. 이와 같이‘ ㅌㆍㄷ’의 결성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이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등의 낡은 사조와 결별하고 자주성의 원칙에 따라 전진하는 역사적 기점이 되었으며 새로운 유형의 혁명조직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2.추수폭동과 춘황폭동
1931년 9월부터 연길현과 왕청현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인 농민들은 추수폭동을 결행하였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각지에서는 소작투쟁위원회가 조직되고, 돌격대, 규찰대, 적위대, 구호대 등의 투쟁대열이 편성되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반동지주를 타도하자, 소작료는 2.8제 또는 3.7제를 실시하라,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조선인거류민회를 타도하자 등의 정치적ㆍ경제적 구호들을 외쳤다.
연길현 노두구 부근의 조선 농민 8천여 명은 7일 동안 계속해서 지주와 군벌에 대해투쟁하여 지주의 쌀을 탈취하여 빈농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투쟁들은 왕청, 훈춘, 화룡 등 각 현에서도 전개되었으며 혁명적 대중은 일제의 무력탄압에도 불구하고 12월까지 지속적인 투쟁을 하였다. 여기에는 10만여 명의 농민들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 추수폭동은 조선 농민에게 대중의 단결된 힘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3.조선항일유격대의 장백지구로의 남하
1936년 2월 역사적인 남호두회의에서 제시된 조선혁명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투쟁 방침에 따라 조선항일유격대의 북만 원정부대는 백두산 일대의 조ㆍ중 국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 즉각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3월 간도 접경지대인 안도현 미흔진에 도착한 북만 원정 부대는 그곳에서 남방부대와 만나 조선항일유격대 군정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왕덕태, 위증민, 김일성, 이학충, 주수동,안봉학 등과 유격대의 간부들이 참석하였으며, 이 회의에서 조선항일유격대-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합군 제2군으로 재편성하는 한편 구국군 사충항부대를 받아들여 3개 사로 확대 재편되었다.
미흔진회의 이후 조선항일유격대는 1936년 2월과 5월에 연속적으로 개최된 역사적인남호두회의와 동강회의 석상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적 형식의 독자적 군대’를 편성하는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현재의‘ 항일연합군’이란 조ㆍ중 혼성부대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4.야영군정 훈련의 전개
조선항일유격대가 동남만 일대에서 제1로군이 내외의 고립무원 상태에서 간고한 투쟁을 견지하고, 길동과 북만 일대의 항일연군 제2, 제3로군이 엄중한 정황에 처해 있던 1940년 말 남만, 길동, 북만성위와 각 군의 대표들은 소련 경내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재차 연석회의를 소집하고 동북항일유격투쟁의 전체 형세와 향후의 투쟁방침에 대해 토의하였다.
* 이 회의는 소련극동방면군 대표 왕신림의 요청에 의해 개최되었는데 왕신림은 1940년 9월 항일연군의 각 책임 간부에 대하여 하바로프스크 항일연군 영도간부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구하는 전신 연락을 보냈다.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항일연군의 주요 간부들은 우선 제1로군을 대표한 제2방면군 총지휘 김일성과 남만성위 대표 안길, 서철, 제5군장 시세영, 정치위원 계청, 그리고 제3로군의 총지휘 이조린, 정치위원 풍중은, 북만성위 서기 김책 등이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이 회의를‘ 하부에서의 비수회의’라고 기록하면서 그 개최 일자를 1941년 1월 6일 이라 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