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나누어 당신의 팔 또는 다리 한쪽, 당신의 머리 한 켠을 나에게 주고 나 또한 기꺼이 당신에게 나의 심장, 나의 눈 하나, 나의 노래 한 소절을 주는 그런 만남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과 나는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있고, ‘공동-내-존재’로서 내가 나를 고집하지 않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건대 이미 나는 내가 아니면서 나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이 아니면서 당신이다. 나를 부정할 수 있고 또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자유로움에 온전히 나를 맡길 때, 그리고 그대도 그러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공동체에 관하여」중에서
“원한과 공포로 가득 찬 사회는 ‘삶’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강해져야 살 수 있고, 살아 있어야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를 하고나면? 아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제로-섬(zero sum) 게임이다. 아니, 자칫 잘못하면 합이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복수는 흔히 복수를 낳기 때문이다. 계산이 끝나지 않는다. 아마도 원한과 공포는 계산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너’에게 내어주어 계산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지 않은 데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너’에게 내어주지 않고 ‘나’만의 그 무엇, 즉 1의 자리를 고수한 채 ‘너’와 대면하면서, 그렇게 계산하면서 원한과 공포의 사슬로 얽힌 것인지도 모른다.”
---「평화와 우애의 신호를 기다린 사람들」중에서
“슈트라우스가 관찰한 ‘커플들’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자리에 돌아왔으나 아내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남편, 수차례 결별에 실패하여 늘 끝에는 ‘폭력을 일삼던 팔로 서로를 포옹하는’ 남녀, 밀회의 쾌감으로 귀가 시간을 놓친 두 남녀의 조급한 마음, 투신 소동으로 애인에게 진실함을 증명하려는 여자, 아침에 돌아왔으나 반쯤 불에 탄 집을 보게 된 유부녀, 4년 만에 다시 만나서도 ‘나의 과오’를 침착하게 나열하는 여자의 끔찍스런 키스,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남편과 무표정한 아내, 주말이면 마약중독자 클럽으로 바람 쐬러 나가는 사무원 부부의 기이한 열정, 동반자살에 성공한 노부부, 아이슬란드 북쪽 해안에서 목격한 바다와 대지의 성교, 출산으로 창의력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디자이너, 노래 소리로만 존재하는 그녀 등.”
---「‘잃은 것’에 관한 슬픈 회상에서 터져 나오는」중에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잠재력, 즉 선(善)한 의지를 애써 위반하여 악행에 의지한다면, 인류의 미래란 없다. 악(惡)의 근거는 ‘생각 없음(unthoughtfulness)’에 있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반성적 사유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는 악을 초래한다. 알면서 반칙을 행하는 자들은 그러한 토대 위에서 ‘사람다움’ 자체를 파괴한다. 우리의 사유와 행위가 세계의 경멸(contempus mundi)과 파괴로 나아갈 것인지, ‘세계사랑(amor mundi)’로 나아갈 것인지는 오로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세계는, 지구는, 사회는,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는 나와 당신의 책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경멸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할 것인가」중에서
“4월은 더욱 잔인한 달이 되었다.
이젠 잊고 싶은 이름들이 마치 악령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힘겨운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살림은 나날이 힘들고, 이른바 이름값 하는 사람들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썩은 내를 천지사방에 맘껏 진동시키고 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오늘 또한 내일과 달라야 하거늘 여전히 낡은 것들은 새 봄의 기운을 가로채 회춘을 이루고, 새로운 것들은 그 기운을 도둑맞아 싹을 틔워보지도 못한 채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럴진대, 지금 눈앞의 이 찬란한 봄의 꽃은 무슨 의미인가.”
---「1960년 4월의 푸른 하늘과 붉은 대지」중에서
“인간도 낱알처럼 세어진다. 명사(名詞)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고정시켜 셀 수 있게끔 고안된 언어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명사는 일종의 수사(數詞) 아닐까. ‘다가와 수영을 하는 이의 가슴을 때리는 물’이라든가, ‘감은 눈 속에서 떨며 떠오르는 어렴풋한 그림자의 장미’, ‘강물이나 꿈길에 절로 실려 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이가 느끼는 감각’ 등, 형용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를 사용하는, ‘틀뢴’이라는 나라가 있다. 보르헤스(1899~1986)가 『픽션들』 안에 만든 세상이다. 몇 %에 속하는 곳이 아닌, ‘달’이라 말하는 대신 “어둡고 둥그런 위에 있는 허공에 밝은”이라고 말하는 ‘틀뢴’으로 가고 싶다. 그럴 수 없는 걸까.”
---「차마 견딜 수 없는, 숫자로 계산된 생각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