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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름다운 날에 4
eBook

우리 아름다운 날에 4

[ EPUB ]
김영란 | 가하 | 2013년 02월 18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0 리뷰 60건 | 판매지수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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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2월 18일
이용안내 ?
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5.49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32.4만자, 약 10.7만 단어, A4 약 203쪽?
ISBN13 978896647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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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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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떨며 흐느끼는 여자의 모습이 문득 오래전 피투성이 발을 하고 서 있던 그녀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없이 떨고 있던 모습과 겹쳐지자 서현은 더 이상 화를 내고 싶은 생각도 싹 가셔버렸다. 아니, 다 쏟아놓고 악을 쓰고 나니 몸속에 눌려 있던 체증들이 쑥 내려간 기분이었다. 그럼 후련해야 할 텐데, 딱히 후련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허탈하다는 것은 이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이 미련한……, 미련한 여자야.”
조금씩 눈가가 젖어가던 서현은 가까스로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부릉부릉 하는 엔진 소리와 자갈밭을 구르는 타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주 먼 곳의 아득한 소리로 느껴질 뿐이었다.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맥이 풀려서 어떻게 침대 위로 올라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불처럼 타오르던 증오심도, 분노도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허탈감과 무력감만이 남아 있었다. 눈꺼풀을 뜨고 있기도 힘들만큼 피로가 몰려왔다.
온몸이 무겁고 욱신거렸다. 한창 몸부림칠 때는 몰랐지만 긴장이 풀리고 나니 여기저기가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서현은 벽 쪽을 향해 누웠다. 쉬고 싶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잠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가, 얼른 입자. 미안하다.”
등 뒤에서 그의 엄마가 옷을 주워 입히는 모양이었다. 소리를 죽여 속삭이는 소리와 아직도 서러움이 담긴 은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서현은 애써 모든 소리를 외면하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울음소리도 잦아들어 겨우 끊어질 듯 말 듯한 울음소리만 들렸다. 이제 방 안엔 그와 그녀만이 남아 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도 서현은 선뜻 돌아누울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은재가 그의 귀에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의식이 멀어지고 몸도 나른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과 속삭임은 꿈결에서도 이어졌다.
온전히 증오할 수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는 여자였다. 눈을 뜨고 바라보면 참을 수 없는 증오심이 솟구쳤지만, 눈을 감으면 또다시 그리움처럼 밀려드는 여자였다.
어렴풋이 시험이 있지 않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한동안 신문도, TV도 보지 않고 지내온 그에게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지만, 몸이 회복되고 정신이 말짱해지면서 그저 시기적으로 시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었다. 작년에 눈을 다쳐 수술을 받고 난 후에도 2차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던 12월에는 일부러 신문을 샅샅이 뒤져보기도 했었으니까. 거미줄과 싸워가며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 내려가느라 눈은 아른거리고 지독히도 피로했지만, 결국은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모두 확인했었다. 누군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했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별장에 들어섰을 때, 형빈의 차를 보았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언제든 자신의 살길을 마련해두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자, 그나마 마음을 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 여겨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떠난 여자였다. 한 번 더 떠나보낸다 해도 더 이상 상처가 될 것 같지 않았는데, 그렇게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었다.
그러나 막상 형빈의 얼굴을 보고 재우의 말을 듣고 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금이 가기 시작한 감정의 균열은 그동안 애써 분노를 누르고 써왔던 냉정한 가면조차도 순식간에 깨뜨려버렸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구석에 걸린 카메라부터 박살을 내고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주먹으로 연이어 거울을 내리쳤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 스스로에게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네가 미련한 여자란 건 알아?”
“……으응.” 
쉰 듯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와 은재는 고개를 들었다. 서현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다.
“벗으랬다고 진짜 벗어? 너 바보야?”
“그, 그런 거 같아. 바본가 봐. 널 이렇게…… 아프게 했잖아. 피 나.”
서현의 목소리를 듣자 은재는 구원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비난하는 것인지, 용서를 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나 표정만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하는 냉담한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욕을 해도 말을 걸어주는 것이 더 좋았다.
은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현을 바라보며 천천히 침대에 다가가 위에 앉았다. 깨진 유리조각을 쥐고 있었던 그의 오른손에선 아직도 피가 나오고 있었다. 은재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가슴에 가져가 꼭 끌어안았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그를 만져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서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은재는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서현의 손이 열린 셔츠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냉담하고 건조한 표정과 달리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몇 번을 그렇게 쓰다듬던 서현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뚫어질 듯 그녀의 가슴을 응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것이 마치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그만 됐어. 서울 가. 시험 봐라. 그리고 여긴 다시 올 필요 없어. 약은 손 안 대. 그렇지만…… 우리 끝났다, 이미 끝난 거야. 처음으로 되돌릴 순 없어. 그러니까 그만 가.”
서현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손에서 묻은 피가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마치 그의 손으로 심장을 끄집어낸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영락없이 손바닥에 튀어나와 죽어가던 심장을 먹어치운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안 가, 싫어. 안 갈 거야! 여기 있을래. 여기, 네 옆에 있을래. 가란 말 하지 마.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피곤해.” 
서현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 벨을 눌렀다. 인터폰이 켜지자 간단히 말했다.
“주사 놔줘. 자고 싶어.”
“서현아, 용서해줘. 내가 잘못했어. 나도 너 없으면 안 돼. 사랑해, 사랑한다고. 한 번만 기회를 줘. 제발…….”
등 뒤에서 애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서현은 눈을 감았다.

새벽녘, 뒤척이던 서현은 눈을 떴다. 무언가 등 뒤를 막고 있어 돌아누울 수가 없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몸을 옆으로 조금 움직이자 곤히 잠들어 있는 은재가 보였다. 그의 셔츠 자락을 손으로 꼭 쥔 채 새우처럼 등을 말고 잠들어 있었는데, 그가 몸을 뒤척이면서 옷자락이 빠져나가자 잠결에도 더듬거리며 셔츠 자락을 찾아 손에 말았다.
서현은 조금씩 손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고 무거운 팔을 들었다. 주사를 놓은 다음 손을 치료한 모양이었다. 핏자국이 깨끗이 지워지진 않았지만 상처부위는 붕대로 단단히 감겨 있었다. 
가끔씩 자다가 이렇게 눈을 뜨고 깨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은재는 그의 곁에 있었다. 침대 발치에 누워 자고 있을 때도 있었고, 그를 끌어안은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잠들어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약 기운이 남아 있어 오래 지켜보지 못하고 또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지난밤 정말로 그녀가 곁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꿈일 뿐인지 분명하지가 않았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곳에 온 이후로 몸이 회복된 가장 큰 이유는 자면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숙면을 취하고 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도, 머리도 훨씬 가벼웠다. 덕분에 식욕도 생기고 예민하게 곤두섰던 신경도 점차 안정되었던 것이다.
문득 갈증이 났다. 서현은 몸을 일으키며 은재의 손에 잡힌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보호사들과 몸싸움을 심하게 했기 때문에 여전히 몸은 무겁고 욱신거렸지만 잠은 실컷 잔 모양이었다. 몸에 비해 머리는 훨씬 맑았다.
주방으로 나가자 보호사가 먼저 나와 있었다. 교대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현이 방에서 나오자마자 따라나온 것이다.
“물 마시러 나왔어요. 몇 시예요?”
서현은 스테인리스컵므 들어 물을 따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새벽 2시 반인데요. 더 주무시려면 주사 한 번 더 놓을까요?”
“충분히 잤어요. 물만 먹고 들어갈 거예요.”
“아, 그 아가씨도 진정제 약간 주사했어요. 많이 흥분했던 모양입니다. 불안해서 잠을 못 자더라고요. 자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선생님이 처방 내리셨어요. 아침까지 충분히 잘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얌전히 잘 테니까 들어가 봐요.”
서현은 방으로 돌아왔다. 은재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자고 있었는데, 손에는 시트 자락을 감아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옷도 갈아입지 않아 핏자국이 얼룩진 그 셔츠 그대로였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두덩과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꾀죄죄한 얼굴이었다.
서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얼추 잠이 깬 탓인지, 잠결에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은재가 옆에 있는 것이 몹시 의식되어 자리에 눕고도 한참을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또 옷자락이 잡혀버렸다. 집요할 정도로 손가락에 말아쥔 것과 달리, 은재의 몸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잠들기 전 그가 했던 냉정한 말 때문이리라.
서현은 손을 뻗어 가만히 은재의 셔츠를 풀고 손을 넣었다. 봉긋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이 손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약하긴 해도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오래되었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느낌 그대로였다.

다행이야, 제대로 뛰고 있어.
부디 널 죽이는 일이 없기를, 꿈속에서라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규칙적인 리듬에 안심한 서현의 눈꺼풀도 서서히 감겼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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