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2도의 아침에 ‘옛날 겨울’을 진정으로 즐기는 존재는 동물들이다. 눈송이가 말 등으로 떨어져도 워낙 털이 두꺼워서 절대 녹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 말은 금욕적인 동물이지만 그건 순전히 내가 지어낸 나만의 생각이다. 파리 떼가 새카맣게 몰려다니는 여름에 비하면 춥고 혹독하지만 건초와 깨끗한 물이 충분한 겨울은 불평할 게 없다. 돼지들은 하루 대부분을 우리 안에서 서로 뒤엉켜 보낸다. 돼지들은 털이 짧아 알몸처럼 보이지만, 말하자면 땅 위의 고래 같은 존재라 극도의 혹한에도 끄떡없다. 따뜻하게 지켜 주는 두툼한 지방층을 온몸에 외투처럼 두르고서 평화로움을 즐긴다. 동물들은 내가 모자를 뒤집어쓰고, 정강이에 각반을 감고, 벙어리장갑을 끼고, 눈만 내놓은 채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집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이 얼마나 딱한 피조물인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는다. 경제가 무너져도, 정치가 부패해도, 혹여 개인적 슬픔이 찾아와도 자연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이 농장의 다른 생물들은, 이 놀랄 만치 긴장된 인간의 계절에 내가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겁먹은 채 사로잡힌 그 느낌, 무언가 근본적인 것을 잊어버렸다는 느낌에서 나는 날카로운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뱀이 허물을 벗듯 나도 내 피부를 통째로 벗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낡은 외피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공기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재생과 부활의 은유를 즐겨 쓰지만,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바로 봄의 실재성이다. 매 시간마다 눈 더미가 한 층씩 벗겨지고 얼음이 지배하던 영역이 줄어든다. 맨땅이 드러나고 수액(樹液)이 솟구쳐 오른다. 방울새들은 짝짓기를 위해 털갈이를 한다. 나는 계절과 함께 나 역시 바뀌기를 바라면서 이들 사이를 거닌다.”
“자연은 인간에게 거듭해서 똑같은 교훈 두 가지를 알려 주고 있다. 하나는 바로, 생명이란 어떤 모양이든, 첫눈에 얼마나 낯설어 보이든, 결국 우리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가까운 유전적 친족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말벌의 인지 행동을 연구한 동물 행동학자 엘리자베스 티베츠의 말 속에 아주 잘 요약되어 있다. “말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정교하다”는 게 티베츠의 결론이었다. 언제나 결론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제로섬게임처럼, 말벌이 정교할수록 인간은 덜 정교하다는 뜻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동물들의 정교한 행동은 얼마든지 더 있다. 언젠가 우리는 모든 생명은 우리의 생각보다 정교하다는 최종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처음 새를 눈여겨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새란 내가 가진 조류도감 속에서 자유롭게 날고 있던 모습처럼, 장소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로운 생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무언가를 유심히 보는 행위는 그것이 있는 장소 또한 시야에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 거주지가 끊임없이 겹쳐지며 인접해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인간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만 아니라면, 장소와 천직에 속박되지 않고 사는 드문 생물이다. 우리는 주변의 다른 생물들이 거주지에 얼마나 깊게, 그리고 아름답게 속박된 채로 사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