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저 ‘실사구시에서 답을 찾다’를 쓴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조선시대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를 썼듯이 오늘을 사는 공직자로서 새로이 목민심서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경험한 일들에 대해 맥락을 갖추어 쓰되, 아쉽게 이루지 못한 일들도 함께 담았습니다. 보다 손쉽게 접하여 세상이 더 밝고 풍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이 책을 읽는 사람도 함께 의미 있는 성장을 이뤄내길 기대합니다.
대학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민선 구청장까지 올랐습니다. 도시경영을 하고 싶었고 경세가經世家가 되고자 했습니다. 30여 년간 도시경영 경험은 행정인 동시에 경제고 정치였습니다.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공직에 있는 동안 줄곧 새기면서 일했습니다. 삶은 매순간 경제이기에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언제나 정치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물결이 모든 생활을 바꾸고 있습니다. 강대국의 자국우선주의는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계층 사이의 갈등이나 가치의 충돌은 사회적인 통찰과 지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은 뒤에 조선 중기 선각자들 중심으로 개혁과 개방, 실학의 기풍이 일어났습니다. 사실과 진실, 상식과 원칙, 실용과 실리 등을 중시함으로써 현실적 삶의 개선과 공동체의 발전에 눈을 돌렸습니다. 서구의 산업혁명보다 결코 늦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정조의 승하와 함께 실학도 퇴조하고 조선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서양은 산업혁명과 함께 상업과 공업이 중시되고 나라가 번성하였습니다. 조선은 실학이 있었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깨지 못했고 사회변혁의 모멘텀도 얻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 실용주의가 주창된 19세기 후반에 일본은 개혁하고 개방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쇄국鎖國하고 개혁의 노력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나라조차 빼앗겼습니다. 허울뿐인 가치에 사로잡혀 실사구시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자유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의 성공, 민주화 투쟁의 70년 현대사는 개혁과 개방, 실사구시로 성공한 역사입니다. 이제 다시는 나라를 잃는 일도, 후퇴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경계의 마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더 잘 살면 좋겠다는 희망의 마음도 함께 이 책에 담았습니다.
---「머리말」중에서
민본民本의 정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다
실학은 봉건제 말기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그 동요와 붕괴의 역사행정에 동행하면서 새로운 국가 사회를 전망하고 현실을 개혁해 나가고자 자연스럽게 생성된 사상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꼽는다. 정약용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널리 펼쳐진 실학이라는 표현을 당시에는 쓰지 않던 말이었는데, 20세기 초에 일반화됐다. 오늘날 실학이라고 말할 때는 크게 두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우선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자기 수양을 우선시하는 유학 본래의 지향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보는 해석과 한편으로는 공허한 논쟁에 빠진 당시 조정과 학풍에 대해 비판하는 실천적 성격에 중점을 둔 해석으로 나뉜다. 정약용 선생은 두 가지 개념 모두를 포괄해 실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꼽힌다.
정약용 선생은 18년에 걸친 유배생활과 이후 50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정치와 행정에서부터 천문과 지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었으며, 그 중에도 사서육경으로 불리는 유학의 기본이 되는 경전 해석과 실생활에 밀접한 정치, 행정, 법률 분야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기는 왜란과 호란, 두 번의 큰 전쟁 이후 백성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졌으며, 지도층들은 공허한 싸움만 벌이던 때였다. 그래서 그의 연구와 저술이 실학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실용주의(Pragmatism)에 관심을 가졌다. 발생 시기가 조금 늦지만 지향하는 바는 실학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이나 실체를 기초로 하여 문제를 풀어가고, 공리공론에 얽매이기보다는 삶의 현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간다는 점이 그렇고, 과학적·합리적 해결 방안을 추구한다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을 보면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진행된 도시화, 민주화로 인하여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으며, 갈등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게다가 남북분단 상황이 가져온 이념갈등, 법치주의의 미정립, 민주주의 미성숙으로 효율적인 정부, 제대로 된 정치는 아직 요원한 상황이라 실학이 지향했던 원칙과 실리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약용 선생이 살던 시대에도 정파가 다르면 같은 사실을 달리 해석하고, 따라서 올바른 처방이 내려지지 못한 채 서로 다른 파벌의 잘못을 들춰내고 공격하는 소위 당쟁과 사화로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임진왜란을 봐도 서인이었던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김성일이 통신사로 함께 일본을 다녀왔지만 각기 다른 보고를 하여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조정이 읽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채택되고 미리 대비되었어야 하는데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오늘날도 그 당시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가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고 국정이 국회에서 다루어지는 정파 간의 다툼은 매한가지다.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보다는 자기 당파의 주장과 이익에 몰두하여 국민들의 삶, 즉 민생은 뒷전이다. 최근에는 정보화 시대가 되어서 온 국민이 언론과 인터넷 등을 통해 이러한 행태들을 낱낱이 알게 되니 민심이 이반되고 기존 정당을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이는 당리당략과 파벌주의가 극에 이른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극복하는 원리는 원칙과 실리를 중시하는 실학, 실용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군주제와 신분제라는 사회 제도가 분명했다. 때문에 지켜야 할 원칙이나 구해야 할 실리도 그에 맞춰졌다. 위로는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형제에 대한 효제孝悌에 최선을 다하면서 아래로는 백성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생산을 늘리고 세 부담을 줄이며 풍속을 교화하는 일이 원칙이 되고 실리가 돼 있었다. 이를 위한 개혁은 학문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생각해 봐도 기본적인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잘 사는 나라, 자랑스러운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공직자로서의 소명의식, 즉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를 튼튼히 세워 가는데 충성과 정의로운 자세를 가지되 자기수양, 청렴은 공복公僕으로서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되 결코 개인이나 당파의 이익을 우선해서는 안 된다.
위정자는 탁상공론을 버리고 현장으로 나가 민생을 제대로 살피는 것도 중요한 원칙이다. 소명의식, 청렴, 주민중심, 현장중시야말로 오늘날 공복이 가져야 할 원칙이다. 실리에 충실한 것도 중요하지만 공허한 논란보다는 실현 가능한 목표와 방안을 세우고, 근본적 해결이 되도록 정책 추진을 하며,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길을 선택해야 한다. 실현가능성, 목표달성, 경제성 등이 현대 정치와 행정의 실리다. 실학이 발생하던 때와는 시대가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에는 주민 혹은 국민이라고 부르는 백성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민본民本의 정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다. 국민을 위한 학문적·실천적 개혁, 그것이 곧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실학의 진정한 취지가 아니겠는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