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테랑 사건은 자명한 대독협력자(부스케, 파퐁, 투비에)나 레지스탕스 영웅(장 물랭, 오브락 부부)만이 아니라 레지스탕스 출신의 현직 대통령도 반세기 전의 과거를 둘러싼 의혹 제기와 폭로 및 논쟁을 피해 갈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13쪽
프랑수아 미테랑이 임기 만료를 불과 8개월 남겨 둔 시점인 1994년 9월, 그가 실제로는 1930년대 청년기에 극우 조직에 몸담았고 독일강점기에 비시 정부 산하의 기구들에서 근무했으며 투철한 페탱주의자였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 ---14쪽
『르 몽드』지는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미테랑의 청년기 전력前歷에 대한 당의 침묵에 분노”(9월 7일)했고 “미테랑에 대한 폭로가 사회당을 분열”시켰다(9월 9일)는 등의 제목으로 9월 6일부터 연일 사회당 내의 논쟁을 보도했다. ---25쪽
미테랑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자는 진영은 미테랑의 과거를 문제 삼는 사람들을 “사냥개 무리”(앙리 베베르Henri Weber), “과거를 뒤적거리는 자들”(이베트 루디Yvette Roudy) 등으로 부르면서 이들의 비판행위를 “마녀사냥 재판”(앙리 에마뉘엘리Henri Emmanuelli), “파괴작전, 정치적 살해”(루이 멕상도Louis Mexandeau)로까지 규정했다. 나아가 이러한 비판이 단지 당내의 권력투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파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고 미테랑 개인을 넘어 사회당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27쪽
부스케 재판을 저지하기 위해 미테랑이 모종의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또한 충격과 분노를 야기했다. 클라르스펠드는 미테랑이 임기 초부터 프랑스인들에 대한 반인륜범죄 소송을 막는 노선을 취해왔다고 단언한 것이 특히 충격을 주었다고 밝혔고, 미옹은 “대통령이 사법절차를 방해했다고, 즉 사법당국에 압력을 행사했다고 인정했는데 어떻게 프랑스인들이 삼권분립과 민주주의를 여전히 믿을 수 있겠느냐?”라고 강력히 반문했다. ---37쪽
일명 “붉은 포스터”로 불려 온 문제의 포스터는 1943년 여름과 가을 파리 한복판에서 독일점령당국에 맞서 유일하게 무장투쟁을 벌였던 이민노동자 의용유격대FTP-MOI 대원들을 묘사한 것이다. ---87쪽
왜 공산당이 외국인 전투원들의 역할을 은폐해 왔는지, 1943년 파리에서 외국인 공산주의 투사들이 몰락한 조건들에 관한 “의심과 불확실성”은 왜 생겨났는지, 마누시앙의 마지막 서한에서 배반자와 밀고자의 존재를 암시한 구절이 전후戰後의 공산당 출판물에서 왜 삭제되었는지 ---102쪽
2008년까지 프랑스 정부가 ‘레지스탕스 전투원’에게 공식적으로 발급한 증명서는 모두 26만 2,730장이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레지스탕스 참여자의 수를 이보다는 약간 높게 30만~50만 명으로 추산한다. 최대 50만 명으로 잡아도 전체 인구 대비 1.2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129쪽
레지스탕스는 장밋빛 경험만은 아니었다. 즉, 레지스탕스는 강점기 내내 언제나 소수였고, 국외 레지스탕스와 국내 레지스탕스 사이에, 국내에서는 공산당계와 비공산당계 사이에, 심지어 같은 조직 내에서도 언제나 분열과 대립, 경쟁과 알력에 시달렸으며, 배반과 이중 첩자가 존재했고, 유대인 박해를 저지하는 데 미온적이었고, 1944년의 해방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아니었고 ---130쪽
역사가 피에르 라보리는 자신의 1994년 논설 제목을 “엄중한 감시를 받는 역사가들”이라고까지 달았다. 이는 레지스탕스사 역사가들은 언제나, 레지스탕스 출신의 증인/당사자들의 감시를 받기 마련이라는 진단을 표현한 것 ---145쪽
초기에 6?18 촉구 연설이 미친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고 국내 레지스탕스의 탄생은 드골의 이 행위와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서술 순서는 마치 드골의 6?18 촉구와 ‘자유 프랑스’의 영향으로 국내 레지스탕스가 탄생한 것으로 잘못 인식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순서로 서술하면서도 국내 레지스탕스가 드골 및 ‘자유 프랑스’와 “무관하게” 발전했음을 적시한 교과서는 오직 2종뿐이었고---192쪽
이들의 존재는 전후 프랑스인들의 집단적 기억에서 ‘대독협력 프랑스’라는 수치스런 기억을 지워 내기에 충분했다. 해방 후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출신 세력의 집권과 1958년 드골의 권좌 복귀는 그러한 기억의 변형 작용을 더욱 촉진하고 강화했다. ---212쪽
언론에서든, 평단에서든 [철로 전투]에 주목하고 가장 큰 찬사를 보낸 것은 무엇보다도 사실성-진실성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였다. 분명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다큐멘터리가 아니었음에도 사실적인 촬영기법, 인공세트가 아니라 진짜 철로, 직업배우가 아니라 진짜 철도원, 독일군 역할을 한 진짜 독일군(촬영 당시는 포로), 과장되지 않은 연기와 허구적이지 않은 내용 등 진짜 강점기와 진짜 레지스탕스를 보여 주는 듯한 특성들이 주로 강조되었다. ---224쪽
[그림자 군단]에는 오직, 조직 내부의 배반자를 처형하기, 처형 전에 처형 여부와 방식을 놓고 논쟁 벌이기, 체포된 조직원 구출하기, 연합군 병사들을 피신시키기 같은 수세적이거나 주변적인 활동들만 나올 뿐이다. 유일한 총격은 독일군이나 대독협력자가 아니라 존경받던 조직원(마틸드)에게 가해졌다. 이러한 점들은 이 영화가 레지스탕스를 무엇보다도 ‘영웅’으로 묘사하던 기존의 레지스탕스 영화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240쪽
세월이 흐름에 따라 레지스탕스 영화로서나 강점기 프랑스를 다룬 역사영화로서 이전 영화(들)보다 진전된 인식을 보여 준 …… 비시 정부는 단순한 괴뢰정부가 아니라 적극적인 대독협력 정부였고, 대독협력자들은 한줌도 안 되는 무리가 아니었고, 프랑스 경찰은 유대인을 ‘포획’하고 강제이송하는 데나 레지스탕스를 탄압하는 데 꽤 적극적으로 독일군에 협력했고, 레지스탕스는 극소수였고, 레지스탕스주의 신화는 허구였다. ---261쪽
[라콩브 뤼시앵]은 공식 선전과 달리 “메달의 뒷면”에 해당하는 “반反영웅의 예속성과 비루함”을 다루고(『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거물들에 대한 영웅적 이미지, 질질 짜는 성인전”이 아니라 “보통 프랑스인에 대한 정신분석”을 추구한다(『포지티프』). 이는 곧 독일강점기 프랑스에 대한 그간의 “에피날 판화적 이미지”와 레지스탕스주의 전설을 “탈신화화”하는 것이었다(『폴리티크 엡도』). “영웅이 하얗기만 하지 않다면, 개자식도 검지만은 않다”(『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강점기 프랑스에 대한 흑백논리적 시각에서 탈피하는 것이기도 했다.
---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