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피카소의 [여인 초상]을 내 집에 두고 본다
초강력 자석에 이끌리듯 미술을 사랑하고 깊이 음미하며,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작품을 직접 수집하는 열혈 컬렉터 30명을 이 책에 모았다. 이들 가운데는 수백, 수천 억을 넘어 수조 원에 이르는 소장품을 공공에 내놓고 대중과 나누면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작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소장품의 규모나 내용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또 600억 원이 넘는 명작을 비즈니스에 활용해 큰돈을 벌어들이는 사업가가 있는 반면에, 세간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 시대와 역사를 일깨우는 뜻 깊은 작품만 골라 수집하는 이도 있다. 막 싹을 틔우는 무명 작가를 세상에 소개해 스타 작가로 날아오르게 하는 후원자형 컬렉터가 있고, 돈과 성공, 원리 원칙 밖에 모르던 완고한 억만장자가 예술을 만나 깜짝 놀랄 만큼 유연해진 경우도 있다.
마돈나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명품 그룹 LVMH의 회장과 삼성가 패밀리의 공통점은?
좋은 작품을 척척 수집하면서 아티스트에게는 힘을 실어주고 예술계의 토양을 풍성하게 만드는 컬렉터들. 이들은 기대하던 작품이 나오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단박에 달려간다. 컬렉션의 동기나 목적, 규모나 방향성은 제각각이지만 이 슈퍼컬렉터들은 “미술 작품을 수집하면서 복잡한 사회를 읽고 미래를 가늠한다”고 입을 모은다.
‘슈퍼컬렉터’라니, 일평생 미술관에서도 볼까 말까 한 작품을 수백, 수천 점씩 소장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일까? 천만에! 길을 걷다 마주치는 빌딩 앞 조각, 호텔 로비의 그림, 혹은 외국에서 왔다는 특별 전시의 작품이 누군가의 소장품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여행지의 미술관이나 서울의 전시장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소장품을 보고 즐긴다고 생각하면 멀기만 하던 마음의 거리가 성큼 가까워진다. 컬렉션과 컬렉터에 대한 통찰이 필요해지는 이유다. 대중에게 닿는 순간 무한대로 확장되는 예술의 의미와 감성을 컬렉터도 우리도 분명히 안다.
21세기의 메디치가를 꿈꾸는 사람들
작품으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작가, 그 작품을 솜씨 좋게 꿰어 소개하는 화랑주, 그리고 미술품을 기꺼이 사는 수집가. 세 축 가운데 하나만 시원찮아도 미술계의 바퀴는 멈추고 만다. 우리 미술계에서 가장 아쉬운 게 세 번째 축인 수집가다. 새로운 예술 작품에 늘 관심을 두고 창작의 가치에 주목하는 컬렉터는 작가들에게 있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의 동력이 되고, 지역과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는 그런 컬렉터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도 작품성보다는 ‘돈 될 작품’만 쫓는 이들이 많아 아쉬운 현실에서, 저자는 매혹적인 작품을 품에 안은 소장가들의 컬렉션 드라마를 통해 미술을 대하는 취향과 안목, 목적과 방향을 이야기한다.
돈만 쫓는 세상에서 예술에 빛을 더하는 컬렉터의 힘, 관찰자의 힘
미술 칼럼니스트 이영란은 30년 가까이 미술 현장을 누빈 베테랑 저널리스트다. 세계적인 아트 페어와 비엔날레, 블록버스터 전시부터 인사동 작은 화랑까지, 국내외 미술계에서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살아서 펄떡이는 현장을 누비는 동안 그는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 미술에서 현재 진행형인 실험적 미술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살피는 통찰력을 얻었다. 작가들과 만나면서 미술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연유와 맥락을 알게 되었고, 안목 높은 화랑주들 곁에서 작가의 품을 떠난 작품이 대중의 눈앞에 등장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영란은 또 오랫동안 소더비와 크리스티 같은 예술 시장의 최전선 소식에 귀 기울이면서 작품을 사는 사람, 컬렉터들에 주목했다. 이미 세상에 나온 작품의 일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그들 손에 달려 있었다. 컬렉터의 수중에서 작품은 선명하게 살아 숨쉬며 세상에 알려졌고, 수십 수백 년 된 작품도 배경과 조건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달라졌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작품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보는 재미와 기쁨은 특별한 혜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값진 경험이 됐다.
한 가지 더, 이영란에게는 숫자로 환산되는 예술의 시장성, 경제성, 그 아이러니의 핵심을 꿰뚫는 방대한 데이터가 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놓인 작품을 보는 데서 나아가 화려한 무대 바깥 세계까지 두루 살핀 결과다.
『슈퍼컬렉터』는 미술 현장에서 단련된 저자의 두 가지 전문성, 언론인의 균형 감각과 예술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3년간 ‘세계의 슈퍼컬렉터’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면서 저자는 미술을 즐기는 청년층의 관심을 확인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 컬렉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여기 집중한 책이 없다는 데서 『슈퍼컬렉터』를 착안했다. 미술 감상법을 알려주는 친절한 안내서가 많아진 덕에 미술관의 문턱이 낮아진 만큼, 이제는 아트 컬렉션 세계의 또 다른 언어와 풍경을 이야기해보자는 취지다.
오묘하고 파격적인 현대 미술의 맛, 이 예측 불허의 묘미는 함께 나눌 때 배로 커진다. 작품을 사들이는 컬렉터도, 『슈퍼컬렉터』를 쓴 저자 이영란도 한 목소리로 그 기쁨을 더불어 즐기자고 청한다.
저자의 말
16세기 독일서 일평생 구두 만드는 일을 하며 경건한 시를 6,000여 편이나 남긴 한스 작스가 일찍이 “현세에서는 돈이 곧 신”이라고 갈파했듯, 돈이면 못 할 게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미술품은 부유하다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동해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대 미술에는 도대체 납득이 안 가는, 기괴하고 난해한 작품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저런 게 미술이냐”며 남들이 혀를 차는 엉뚱한 작품까지 좋아라 품으며 컬렉션에 몰두하는 이들이 있다. 미술품 수집에 이골이 난 슈퍼컬렉터들이다.
미국 마이애미에 미술관을 짓고 수집품 7,200점을 내놓은 루벨 부부는 가난한 대학원생 시절부터 다달이 25달러를 덜어 미술에 썼다. 경제 공황으로 살 길이 막막해진 1960년대, 뉴욕의 미술가들이 상점 한구석에서 그림을 그려 빵과 우유 살 돈을 마련하자 이를 외면하지 않고 한 점, 두 점 사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루벨 부부는 한결같이 스타 작가보다는 막 싹을 틔우려는 유망주에게 주목한다. 그리고 이들의 후원은 곧 스타 작가로 날아오르는 보증서가 되었다.
프라다의 주인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정치학을 전공한 좌파 운동가 출신답게 아트 컬렉션에 임하는 태도 또한 시니컬하다. 환금성 좋은 블루칩 작품을 사겠다고 화랑에 줄을 대는 ‘짓’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 미술품이 아니라 ‘미술’ 자체에 몰입하길 원하고, 재테크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쌓아놓는 것도 싫어한다. 프라다가 가장 바라는 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기상천외한 프로젝트’다. 건축가 렘 콜하스와 형태를 바꾸는 4면체 건축물을 만들어 세상을 놀래준 ‘트랜스포머’ 프로젝트가 좋은 예다. 주위에선 “왜 무모한 일에 수백억 원을 쓰냐”며 혀를 차지만 눈 깜짝하지 않는다. 무모해서 더 끌린다는 태도, 무목적성이야말로 예술의 가치라고 믿는 신념으로 프라다는 손에 잡히지 않는 예술 개념까지 컬렉션하고 있으니 앞서가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슈퍼컬렉터 서른 명 가운데는 할리우드 인사들도 있다. 영화감독 조지 루커스, 드림웍스 창립자이자 음반 제작자인 데이비드 게펜, 가수 마돈나, 배우 브래드 피트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할리우드의 컬렉터 중에서도 컬렉션의 방향성과 수준이 뛰어난 축에 속한다. 선정적인 가수로만 각인된 마돈나의 컬렉션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와 투철한 목표 의식은 특히 돋보인다.
평생에 걸쳐 모은 컬렉션을 보면 그 수집가가 보인다. 소장품 목록에 안목과 취향, 목표와 비전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 우물을 깊게 판 ‘종적 수집’일 때도 있고, 넓고 다양하게 훑은 ‘횡적 수집’인 경우도 있다. 카지노 거물 스티브 윈은 아예 “화제가 될 만한 알짜 작품만 좋아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렇듯 투자 가치를 지독하게 따지는 컬렉터 또한 적잖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수집품이 쌓여 수백, 수천 점을 넘어서면 공공 미술관에 기증하거나 개인 미술관을 세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한 점 한 점 지극정성으로 수집한 예술품이 어느 순간 나만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멋진 결실인 컬렉터들의 미술관은 작품을 담는 거대한 그릇인 동시에 그 자체로 또 다른 작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