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다. 픽션이다. 하지만 뼈대를 이루는 디테일들이 사실이나 현실에 기반하지 않을 경우, 조롱거리가 되거나 외면받기 십상이다. …… 불특정 다수에게 뿌려지는 드라마가 단순히 글 속에 갇히거나 미학적 완성도만을 좇기보다는 공적 기제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제작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려해지는 영상 테크닉과 하드웨어의 발전만큼 사람 사는 현실의 땅 위에 발을 딛고 그 위에 거대한 서사를 쌓는 드라마들이 제작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p.20~21, 최우수작 「“저기요,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요.”」중에서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경우 제작진은 ‘피해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사전에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 철저히 ‘인권’적인 측면에서, 취재 과정에서 사생활 침해 요소는 없는지, 이 사실을 외부에 공개했을 때 우리 사회의 약자인 피해자를 방송이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며, 언제나 ‘인권’에서 시작해 취재와 편집을 거쳐 방송해야 한다.
--- p.40, 우수작 「도대체 인권은 어디에」중에서
길거리로 나선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주인공은 바로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의 첫 만남은 연예인과 행인으로서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시작된다. 유재석과 조세호는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취업난을 겪고 있는 취업 준비생, 팍팍한 현실에 시달리는 자영업자, 놀고 싶지만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인생의 풍년과 흉년이 무엇인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지 등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지면 의외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연예인-행인의 관계에서 조력자-주인공의 관계로 역전된다.
--- p.73, 가작 「공간의 변주, 로드TV로 진화하다」중에서
아쉽게도 [방을 구해드립니다]는 청년 출연자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그 시각의 진부함이 크게 드러났다. [방구]의 1화에서 전문가들은 보다 넓은 집을 구하던 차주희 씨에게 서울이 아닌 부천의 아파트를, 월셋집을 찾던 이정환 씨에게는 청년 주거 대출을 통한 전세 매물을 제시한다. 서울이라는 큰 조건을 포기한다면, 또는 빚을 지지 않겠다는 고집을 제도적 혜택을 위안 삼아 내려놓는다면, 경제력이 부족한 청년도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다는 노골적인 추파다.
--- p.151, 입선 「방을 구해드립니다」중에서
[SKY 캐슬]은 상류층의 비뚤어진 욕망이 만들어내는 사교육, 입시 문제를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망가지는 아이들의 모습들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지금의 교육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좋은 대학에 합격만 한다면 과정은 불공정해도 용서가 되는가? 과열된 교육열이 진정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인가? 부모의 욕심이 있지는 않은가? 매회 분투하는 부모와 아이들을 보며 시청자들은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인가.
--- p.157, 입선 「‘캐슬’과 ‘머니’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중에서
시청자는 혜자의 삶을 함께 체험하면서 그동안의 이야기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삶 전체라는 것을 알고 강렬한 충격과 깊은 감동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 드라마가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이유는 바로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십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쩌면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간 속에 살고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라는 안내상의 대사를 통해 알츠하이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표현하고 세대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 p.191, 입선 「“나의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같이 떠나보시겠습니까?”」중에서
[전지적 참견시점]은 연예인과 매니저의 일상을 담고 있으며, 그 일상을 다루는 방식에 숨겨진 함의가 상당히 정치적이고 권력적이라는 것을 시청자가 꼭 알아야 한다. 아무리 방송 콘셉트가 ‘전지적 참견’이라고 해도, 이것이 이 시대의 난치병 중의 난치병인 갑질과 꼰대질을 재미로 승화시키는 데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예능은 예능일 뿐,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 p.222, 입선 「전지적 참견이 빚어낸 불협화음」중에서
인물들이 가진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뒤집고 모두를 희생자로 그렸을 때 [왜그래 풍상씨]가 다루는 문제의식은 더 뚜렷해진다. 이풍상은 ‘화목한 가정의 유지’에 집착하지만 그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주체성, 행복 등 개인적인 가치는 인정받지 못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이풍상이 바라던 가족의 모습이었을까? [왜그래 풍상씨]는 이런 모순을 통해 극단적인 가족공동체주의의 폐해를 훌륭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 p.245, 입선 「가족공동체와 개인의 삶, 따뜻함 이면의 그림자 속으로」중에서
출연진들은 노동을 통해 서로의 마음에 있던 벽을 허물고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된다. 고된 일과에도 보람을 얻고,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누며 힐링을 얻는다. 이런 모습은 땀을 흘리며 일하는 노동이란, 사람에게 인생의 활력과 보람을 주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협동하며 살아가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인식하게 한다. [일로 만난 사이]는 이런 노동의 아름다운 가치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며, 노동에 대한 신화를 심어주고 있었다. 노동에 지쳐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을 생계의 유지로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노동에서 생겨난 인간관계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상의 판타지를 심어주는 것이다.
--- p.277, 입선 「판타지로 만난 노동」중에서
결국 시청자를 잘 팔기 위해 광고주가 원하는 특별한 시청자 집단을 고른 뒤 이들이 선호하는 코드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광고는 그 시대에 유행하는 트렌드를 결정짓고, 시청자의 생활 습관을 결정지으며, 프로그램이 제공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덮어버리기도 한다. 오늘날 만연한 간접광고를 보면 프로그램은 시청자를 광고로 유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미끼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방송사들은 광고주에게 방송 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주 소비층인 시청자를 판매하면서 존재하게 되는데 시청자는 이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보호받고 있는 것일지 의문이 든다.
--- p.327, 입선 「광고를 받고 시청자를 사고파는 불편한 거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