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좀 데려다 주라. 우리 최옥희 여사 진짜 증손주 기다릴…….”
“자자.”
힘없이 중얼거리던 여린이 자신의 말을 끊은 준서 때문에 감은 눈을 떴다.
“그러니까 집에 가서 잔…….”
“나하고 자자고.”
늘어져 있던 몸을 추스른 여린이 준서 쪽으로 몸을 틀었다.
“……뭐?”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장난인가. 장난치고는 너무 과하게 도발적이다.
“술 취해서 그깟 놈한테 바칠 바엔 나한테 달라고, 네 몸.”
장난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준서의 진지함에 놀란 여린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됐지?”
“안 됐어. 양여린, 잘 들어. 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나한테 줘, 너.”
장난이 아니란다. 여린은 훅! 숨을 들이마셨다. 아부지, 어무이. 이걸 어째요. 제가 결국…… 도준서를 미치게 만들었나 봐요.
컴컴한 차 안. 준서와 여린은 서로의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린은 준서의 자자는 말에 패닉상태에 빠졌고 준서는 여린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꿋꿋하게 진지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다.
‘이것…… 봐라? 얘, 진심인갑다.’
꿀꺽. 굵은 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여린은 울상을 지었다가, 표정을 없애려 노력했다가, 이젠 놀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여린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는 그 생각만 요란하게 굴러다녔다. 정말 이건 아닌데.
죽을죄를 지었다고 해도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주는 쿨한 놈이 도준서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린에게는 그랬다. 그런데 잘못했다고 말했는데도 준서는 꿈쩍도 않는다. 그러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여린도 저가 잘못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말만 증손주니 어쩌니 위험천만하게 내뱉었지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다. 미쳤다고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 애를 덜컥 가질까.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 정도는 탑재하고 있었다.
그냥…… 이번에 헤어지게 된 남자가 너무 아까워서, 제대로 잡아서 결혼에 골인하고 말리라 결심했던 차여서, 그렇게 바보 같았던 자신을 잊고 싶어서 놀았을 뿐이었다. 신나게 놀고 양여린,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 진가도 모르고 축구공 차버리듯 뻥 차버린 너 아니어도 나 좋다는 남자 많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우울함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게임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젠장!’
후회만 백만 번은 곱씹은 것 같다. 가볍게 시작된 게임에서 연거푸 져버렸다. 아니, 도대체 그 쉬운 3, 6, 9를 왜 못하냔 말이다! 3, 6, 9뿐만이 아니었다. 그 게임에서 내리 지는 바람에 폭탄주 세 잔을 원샷한 여린이 계속 게임을 하자고 우겼더랬다. 순전히 오기 때문에.
여린을 위해준답시고 남자들이 게임을 바꿔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베스킨라빈스, 경마장게임, 프라이팬 놀이 등등. 여린은 계속 졌고 계속 폭탄주만 마셨다. 아마 오늘 마신 폭탄주가 일 년치 술값은 되지 않을까.
집안 내력 덕분인지 말술 소리 듣고 사는 여린이지만 적어도 열 잔 이상, 순식간에 폭탄주를 해치웠는데 취하지 않고 배길쏘냐. 아아, 죽일 놈의 오기. 빌어먹을 미련함이여.
“왜 그렇게 오래 생각하는 건데?”
잠잠하게 침묵을 지키던 준서가 짐짓 짜증 난다는 듯 툭 말을 뱉었다. 저 태도를 보니 ‘우리 자자’가 아니라 ‘내일 만날까?’라고 물은 사람처럼 보인다.
여린은 강아지가 물기를 털어내듯 도리질을 치면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래, 네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덕분에 술기운도 달아났으니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해보자꾸나. 여린은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나하고 뭐야?”
담담하게 묻는 여린에게 준서의 시선이 박혔다. 왜 그렇게 오래 생각 하냐고 물었더니 웬 뚱딴지같은 질문인지.
“뭐가 뭐냐는 거야?”
준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묻는 눈빛에서 심한 짜증이 묻어난다.
“너, 나하고 친구 아니야?”
이어지는 여린의 말에 준서는 고개를 위아래로 절도 있게 끄덕인다. 하지만 그다음부터 준서는 대답을 할 수도,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그럼 너는, 친구하고도 섹스하냐?”
“…….”
“너하고 내가 원나잇 파트너야?”
“…….”
“그렇게 하루 자고 끝낼래?”
말을 잇는 여린의 눈매가 점점 매서워진다. 졸지에 입장이 바뀌자 준서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여린에게 박힌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래, 내가 잘못했다. 친구로서 모자란 모습 보여주게 돼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엉뚱한 사고 안 치게 끌고 와줘서 고맙기도 하고. 그런데 이건 아니지 않냐? 내 몸을 달라니. 보상 수리하는 셈 치고 받았다가 나중에 아니다 싶으면 기기 변경할 거냐, 너?”
이젠 아예 씩씩거리는 여린을 보면서도 다물어진 준서의 입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여린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는 할 수 있겠는데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한다.
준서는 여린을 오랜 시간 알고 지냈다. 그리고 지겹도록 붙어 다녔다. 두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주변에서 그들을 보고 절친이니 소울메이트니, 아무튼 대단한 우정이라고 추켜세웠다.
사람들은 행여나 도준서와 양여린 사이에 이성적인 호감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기에는 두 사람이 붙어 다닌 시간이 너무 길었고 그만큼 알고 있는 것도 많았기 때문에.
누구와 언제 사귀었다가 헤어졌는지, 사귀는 동안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연인인 상대방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이. 하다못해 준서는 여린의 생리주기까지 꿰고 있었고 여린은 준서의 눈짓, 손짓만 보고도 그날 그의 기분이 어떤지 알아맞혔다.
서로의 연인이 둘의 사이를 질투하지 않았다면 어불성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남매 같기만 한 두 사람을 의심할 건더기가 없었다. 그렇게 견고하게 쌓아진 우정. 그런데 그 우정이라는 게, 잔다고 사라지는 건가?
“왜 원나잇이고, 왜 하루야?”
한참을 고민하는 듯 보이던 준서가 꺼낸 말에 여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계속 자자고? 친구로서 그게 그리울 때마다 서로 보듬어주자고? 하…… 그것도 말이라고.”
“친구가 아니라 애인 사이면 괜찮다는 거네, 네 말은.”
순서 없이 뒤죽박죽이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한 준서가 대안을 내놓자 여린은 콧방귀를 꼈다.
“왜? 아예 사귀자고 하지?”
“사귀면 문제없는 거냐? 그럼 사겨.”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여린의 어깨가 굳었다. 천천히 준서를 향해 몸을 트는 여린의 큼지막한 눈 안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꽉 차들어 있다.
이런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힌 일이 있나. 세상 모든 남자가 똑같다고 해도 도준서는 다를 줄 알았다. 도준서도 남자지만 수많은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서 있다고 믿었다. 그런 우월한 남자를 절친으로 두고 있는 자신이 복 받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설마가 역시 된다더니.
“도준서.”
이를 악물고 준서의 이름을 뱉어내는 여린의 음성에서 냉기가 흐른다. 준서가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추켜 올렸다.
“너 지금…… 나랑 자기 위해서 사귀자고 말한 거냐?”
“허! 넌 사람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해석을 못 해?”
“지금 니 말이 그거잖아. 친구로서 못 자겠으면 연인이면 되는 거냐며. 그럼 사귀자며. 니가 생각해도 내가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지 않아? 그렇게 생각 안 하게 할 요량이었으면 순서가 바뀌었어야지. 좋아해, 사귀자, 사랑해, 자자. 넌 모두가 다 아는 연애 법칙도 모르니?”
준서의 긴 한숨이 핸들에 닿았다가 차 안으로 퍼진다.
“그래서, 싫다는 거야?”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는 준서의 눈가에 피곤함이 진득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여린의 화를 부추기는 행동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준서였다.
“8 더하기 10.”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덧셈을 요구하는 여린을 준서가 멍하니 쳐다본다.
“……뭐?”
“8 더하기 10!”
“십…… 팔.”
얼떨결에 대답한 준서가 도무지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게 지금 내 기분이다, 이 자식아! 에라이, 나쁜 자식!”
차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소리를 내지른 여린이 그대로 차에서 내려 문짝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문을 닫아버린다.
그때까지도 이게 무슨 일인지 감을 잡지 못하던 준서가 황급히 차에서 내려 여린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너 여기가 어딘지 알고 막 걸어가!”
“말 걸지 마! 너하고 절교야!”
“그럼 사귀자니까!”
휘익! 준서는 간발의 차이로 여린에게서 날아온 물건을 피할 수 있었다. 섬뜩한 기분에 떨어진 물건을 쳐다보니 여린의 휴대전화이다. 이제는 고유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분홍빛 휴대전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