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풍요로워지고, 너희들의 아비, 그러니까 일광이는 아버지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가기 시작했다. 틀린 것은 틀린 것이기에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 내가 그 성격에 진저리냈던 것은, 허투루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네 아비는 똑똑하고 영리했으나 그 올곧음 때문에 많은 욕을 봤다. 기울던 나라가 폭삭 사라지고 외국인들이 종로를 걸어 다니고 일본인들이 총칼을 차고 다니는데도, 한성이 경성이 되었는데도, 네 아비는 죽어도 대한 독립 만세를 하겠다고 거리를 쏘다녔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고, 지하에 숨어 뭔가를 꾸미고, 흔히 말하는 ‘독립 뭐시기’였다.
그때쯤, 나는 무엇을 했을 것 같으냐? 나는 결혼을 준비했다. 네 아버지 일광에겐 알리지 않았지. 일광이 알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새벽에 목이 찔려 죽었을지도 몰랐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가난이 나는 지긋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졌다.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워져서, 마침내 푸른 소나무 집에 산다는 늙은 일본인 백작이 나를 탐할 만큼.
--- 「건곤일척」 중에서
제 얘기를 하는 것도 모르는 어린것이 눈을 깜빡, 하더니 울음을 멈췄다. 눈물로 부푼 양 뺨이며 붉어진 눈두덩이 햇빛으로 또렷했다. 어린것의 뺨 위에 분내가 솔솔 날 것 같은 솜털이 돋아 있었다. 무심코 그것을 만져보고 싶어 손을 뻗는데, 박해관이 휙 몸을 돌렸다. 어린것의 얼굴이 저리로 멀어졌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아오마츠, 라고 불러주세요.”
“아니지. 백송연 아닙니까.”
“…과거의 이름이지요.”
“일광의 누이.”
몇 년을 잊고 살았던 이름이 해관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는 딸의 등을 토닥이고 제 몸을 들썩이며 방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아우의 소식을 알고는 계시고?”
“모릅니다.”
“이러니 어찌 아우고 누이라고 할까.”
먼저 누이이고 아우이기를 끊어내자고 한 것은, 그 걸쭉한 피를 담장에 뿌렸던 일광이 아니었나. 송연은 해관의 물음에 그때를 떠올렸다. 비린내가 났었다. 바람이 불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소년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송연은 조금 더… 아름다웠었다.
남매의 연을 끊어내자던 일광의 편지가 소의 피에 젖어 찢어지듯 찢어진 인연이었다. 해관에게서 그 말을 들으리라 생각도 못 했던 터였다. 그래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한 번 바라봐주지 않는 태도에서부터 치욕을 억누르고 있던 송연이었다. 일광을 들먹이며 제 탓하는 해관의 앞에 아무 반박도 못 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왕후장상」 중에서
서은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에 앉았다. 완성하지 못한 그림이 있는 노트를 폈다. 노트에 흑연이 뭉개져 군데군데 그림이 흐려져 있었다. 서은은 입김을 불어 흑연을 털어냈다. 그리고 연필꽂이에서 잘 깎인 새 연필을 들어 그림을 완성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이는 입이 없는 채로도 말을 할 줄 아는데 입을 그리면 되레 그 말이 멎을 것 같았다.
글을 쓰자. 아이의 입을 막는 대신, 글을 쓰자.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서은은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고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원고지 뭉텅이가 가득했다. 그중 한 뭉텅이를 들고 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린 친구야, 넌 그 거리에서 매일 무슨 이야기를 듣고 어떤 것을 보았니? 얘야, 네 동생의 이름은 뭐니? 네 할머니는 어째서 네가 어머니를 닮은 것을 고까워하니?
서은은 책상에 납작 엎드려 종이 안의 여자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강보에 싸인 제 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 아이는 말을 한다. 언니 같은 사람들은 오지 마!
‘나에게 아비는 어미였고, 어미도 어미였다.’
아이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첫 문장을 그렇게 말했다.
--- 「동상이몽」 중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드나드는 것을 아무도 개의치 않아 하는 것이 자유라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가 서은이었다. 어딜 가나, 서은은 거절당하지 않았다. 아오마츠 부인이 호위하는 계집애. 양녀는 아니면서, 정체가 뚜렷하지 않은 미궁 속 어린 계집애. 죽은 백환과 만악의 백낙은 알지만, 백서은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는 그녀가 쓴 글에도 서은의 이름은 없다. 고이 묻은 서은의 숨결과, 잉크와 지문과 울음과 희열이 있는데, 이름은 없다. 글은 온통 서은인데, 세상은 만선을 만악이라고 불렀다. 백서은이 아니라 백낙(落)의, 낙(樂)도 아닌 낙(落)의 것이라 알았다. 결국 백낙(落)은 없는 사람인데…. 존재하지 않는 것에 온통의 자유를 빼앗긴 기분은 생각보다 비참하고,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다. 애당초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게 무언가를 빼앗긴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어이없고 황당할 뿐이었다.
--- 「인지위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