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한테 먼저 연락한 적 한 번도 없어. 알아?”
- 원래, 원래 그래. 아령이한테도 먼저 연락한 적 별로 없어.
“좋은 거 아니야.”
- 알아.
“말도 너무 짧아. 가끔 네 말이 너무 짧고 간단해서 무안할 때도 있어.”
연주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뭔가 얘기를 하려는데 그게 어려운 듯 주저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렇게 따지듯이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 아니야.
“난 가끔 네가 싫은데 억지로 연락하는 건 아닌가 싶어. 솔직히 자존심 상할 때도 있고. 누구든 날 좋아해야 한다고 자만해서가 아니라 나 싫다는 사람한테 매달리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 그건 누구라도 싫은 거 아닌가?”
- 억지로 아니야. 귀찮고 싫은 건 죽어도 못 해.
“그럼 내가 좋아?”
직구를 던졌다. 못된 호기심이 발동해서 생각지도 않게 나온 말이었다. 연주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번엔 주저하는 듯한 한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이른 질문이었다. 동욱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어느 정도 마음은 있냐고 묻는 것이 옳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게 버릇인 것을.
동욱은 인내심을 가지고 연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한숨 섞인 연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래, 너 좋아. 좋은데, 너한테는 내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싫다는 것도 좋다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이동욱이라는 남자를 거부하고 있었다.
“안 어울린다니?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동욱은 자존심이 상했다. 안 어울린다는 건 빙빙 둘러서 전하는 거부와 같다.
동욱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말투도 거칠어졌다.
- 우선 넌 너무 친절해. 주변에 여자도 많을 것 같고. 모두에게 친절하니까 여자가 꼬이는 건 당연한 거겠지. 친절하지 않다고 해도 재수 없게 굴지 않는 이상 네 얼굴 보고 따르는 여자도 많을 거야. 성격이 좋아서 친구도 많고 사람들하고 모여서 놀 기회도 많겠지. 내가 봤을 때 넌 굉장히 잘 노는 애고. 난 잘 놀고 여자 많은 남자는 딱 질색이야. 더군다나 너, 겉으로 보기엔 유순해 보여도 한 성깔 하잖아. 자존심, 고집 센 건 나 만만치 않고. 여러모로 내가 감당하기 힘든 타입이야. 너하고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추구하는 날, 너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고.
반박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었다. 건성건성, 대충대충 연락하고 만나는 줄 알았는데 연주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만큼 동욱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연주의 말대로 따르자면 동욱은 확실히 그녀의 타입이 아니었다. 딱 질색하는 스타일에 가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욱은 이미 연주가 마음에 들었고, 자신의 단점이자 장점인 면들 때문에 놓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너한테만 친절하고 정말 중요한 사람이 아닌 여자는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하고 보내는 쎽간보다 너하고 보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큰일이 아닌 이상 성깔 부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면 나 좋아할래?”
직구에 이어 도전장까지 던졌다. 자존심은 잠시 출타시키고 연주가 세워둔 벽을 허물기 위해 동욱은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연주가 아까처럼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자신이 뱉은 말을 진심으로 지킬 요량이었다.
- 당장 대답하기엔 곤란한 질문이라는 건 알지?
“생각은 해볼 거야?”
- 해볼게.
더 밀어붙여봤자 밀려나갈 연주가 아니었다. 동욱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이제껏 너무 몰아붙였으니 한 수 져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 생각해봐. 이래봬도 나 욕심내는 여자 많다, 너? 너무 시간 끌면 나중에 대성통곡할 걸?”
- 풋! 확실해?
“그럼, 확실하지! 솔직히 내가 얼굴이 좀 되잖아? 하하!”
장난 섞인 말 몇 마디로 어색했던 분위기가 자취를 감췄다. 조용한 어투로 인색한 말을 뱉어대던 연주가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동욱은 만족했다.
한참을 웃게만 해주던 동욱과 통화를 끝내고 연주는 큰 숨을 몰아쉬었다.
‘나 좋다는 남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네.’
동욱과 통화를 하면서 마시던 커피가 남아 있었다. 유리잔에 얼음 몇 개를 더 집어넣은 연주는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연주는 자신의 쌀쌀맞고 냉정한 태도와 말투가 남자들을 질리고 지치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더 그렇게 했다.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얼마나 아픈지 충분히 겪었으니까.
작정하면 애교야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고 웃어주는 건 밥 먹는 일보다 쉬웠다. 예쁜 말,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하는 건 연주의 특기였다. 하지만 연주는 사랑받을 수 있는 모든 장점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다시는 사랑받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그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기도 싫었으니까.
동욱은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밀어내도 밀쳐지지 않았고 상대방의 나쁜 면을 좋게 포장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사람. 단순하고 가볍게 보이지만 진중한 사람. 그래서 떼어내는데 애 먹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동욱은.
“후우. 난감하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고 지그시 눈을 감은 연주의 얼굴에 걱정과 피곤함이 그득했다.
가볍게라면, 마음을 모두 주지 않는 연애라면 한 번쯤 해봐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연주가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동욱은 그렇게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며칠 만에 동욱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이제는 그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문자 메시지가 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고 전화가 오면 내심 반갑기도 했다.
연주는 그게 무서웠다. 누군가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그 대상이 남자라는 것이 무서웠다.
이별 후에 오는 아픔이 두려워서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연주였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말과 똑같다며 열정적인 사랑을 선호했던 그녀였다.
……그랬던 연주가 이제 아픔이 무서워 행복을 피하려고만 하고 있었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훗.”
자조적인 미소가 연주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고작 스물 초반에 유일하게 내세울 건 자존심밖에 없다고 여기던 연주가 그 자존심을 잃었다. 연예인처럼 예쁘지도, 마론 인형처럼 몸매가 끝내주지도 않았기에 그녀가 자랑거리로 내세웠던 게 자존심이다.
꿀릴 것 없는 집안의 외동딸이었고 대학을 가지 않았어도 제 능력만으로 밥 벌어 먹고 살았다. 그러니 자존심만 천정부지로 솟구칠 수밖에.
군화를 거꾸로 신은 그 남자와 3년 가까이 사귀었지만 알고 보니 사랑보다 믿음이 더 컸었던 것 같았다. 그 믿음이 버림받고 동시에 자존심까지 잃어버린 터라 그 당시에 받은 충격이 스물다섯이 되어 버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연주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벗어날 때가 됐다고. 과거에 얽매여 있다가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사랑으로 가는 두 번째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 사람을 동욱으로 정해도 될지, 연주는 푸르른 새벽하늘이 드리워질 때까지 생각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