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 자원을 활용하는 종은 많다. 그러나 세상을 활용하는 방법을 끝없이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다. 인간과 물질은 서로 주고받는 관계이다. 인간은 물질을 탐구하면서 더 다양한 지식을 얻었으며, 물질은 인간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간의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는 기술 혁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재료에 대한 탐구를 통해 모든 감각을 활용하는 직관력을 키우게 되었다. 이 과정은 인간과 물질이 만나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 p.21, 「인간은 사물을 만들고 사물은 인간을 만든다」중에서
핀란드의 자연은 핀란드 디자인에도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사용하는 재료와 유기적 형태 모두에서 마치 핀란드인의 DNA처럼 자연의 요소가 엿보인다. 긴 겨울과 언제나 부족한 빛. 빛에 대한 핀란드인의 깊은 바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는 건축 물 안에 빛에 대한 절실함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또한 핀란드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는 자작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그의 의자는 세계 디자인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자연에 대한 공감과 기능에 대한 철저한 고려, 전통과 지식을 융합하여 만든 핀란드 디자인은 어쩌면 인간과 자연이 함께 쌓아온 공존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 p.95, 「핀란드의 자연 그리고 디자인 수오미(Suomi) 핀란드, 호수와 숲의 나라」중에서
문헌학자 엘리아스 뢴로트(Elias Lonnrot)도 1820년대부터 핀란드 전통 시를 수집했다. 핀란드 동부 지역인 카리알라(Karjala)를 여행해서 얻은 자료들과 이후 의사가 되어 발령받은 지역에서 채록한 시가들을 연구하여 1835년에 『칼레발라』를 출간했다. 이 책은 핀란드 민족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국가적 정체성을 고민하던 핀란드인은 자기들의 언어와 문화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핀란드라는 나라를 알지 못했던 당시 유럽인의 관심을 이끌어내어 핀란드어와 핀란드 문학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후 뢴토르는 다른 학자들이 제공한 자료까지 연구하여 1849년에 새로운 판본을 출판하였다.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가 되었다.
--- p.151, 「칼레발라, 핀란드를 노래하다」중에서
핀란드 사람들에게 사우나는 단순히 목욕을 통해 피로를 풀어주는 공간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사우나는 몸과 영혼을 정화하는 초자연적인 곳으로, 삶이 시작되는 신성한 장소이다. ‘사우나에 들어가면 마치 교회 안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아픈 사람을 사우나에서 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기를 낳기도 하였다. 아마도 엄청난 사우나 열기가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었으리라 여겨진다. 핀란드의 민족 대서사시인 『칼레발라』에서도 사우나는 치유의 공간이다.
--- p.189, 「사우나, 핀란드 디자인의 또 다른 이름」중에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리눅스는 컴퓨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이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더 자세히 보면 이는 공동체, 협업 그리고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이다. 오늘날 우리는 코드 작성을 배우며, 알고리즘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디지털 장비의 사용이라는 의식을 진행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지낼 수 없다. 컴퓨터는 개개인의 제단(祭壇)이 되었다. 마우스는 스크린 위에서 휘두르는 마술사의 지팡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터넷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디스플레이의 빛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컴퓨터가 고장나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고 있는지도 모른다.
--- p.216, 「초자연에서 탈자연으로」중에서
사회의 모습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네트워크에 의해 규정된다. 사물은 격리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사물은 특정한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기능한다. 사물 간의 행동은 상호보완적이거나 상호작용적일 수도 있고, 또는 협력적이거나 통합적일 수 있다. 사물은 다른 사물을 만든다. 사물이 만들어지는 유형과 속도는 문화적 요소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다중적인 관계는 특정한 형태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 p.229, 「사물들의 네트워크」중에서
인류가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접하고 만든 것이 ‘도구’이다.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도구를 제작하고 활용하며 신체의 한계를 극복해왔다. 도구를 확장된 신체의 일부로 인지하는 인간의 능력은 더 다양한 도구를 발달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도구의 사용은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공감대를 갖기도 한다. 한 예로 아이스하키 선수와 유럽 중세의 기사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다.
--- p.251, 「도구의 유사성과 연계성」중에서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체의 모든 감각은 환경에 대한 생존 반응으로 발달한다. 길고 추운 겨울의 습한 땅에서 지내야 하니 우선 깔고 앉아야 할 도구부터 필요했음직하다. 그것이 곧 의자이다. 의자는 그들 문명의 시발인 동시에 디자인의 우선적인 관심사였다. 긴 겨울밤을 밝히기 위한 조명과 해가 지지 않는 여름밤의 숙면을 위하여 빛을 가려 줄 커튼도 절실했을 것이다. 이러한 여건으로부터 발전되어 지금에 이른 것들이 가구와 조명으로 알려진 아르텍, 독특한 유리 제품을 판매하는 이탈라, 싱그러운 자연이 담긴 직물을 취급하는 마리메코 같은 브랜드이다.
--- p.273-274, 「감각?환경에 대한 생존 반응」중에서
세대를 아우르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핀란드 중고 문화는 단순히 환경을 고려한 소비를 넘어 사람들과 교류하고 뜻깊은 시간을 보내는 건강한 여가 활동으로 거듭났다. 유행과 시대가 뒤섞인 중고 가게와 벼룩시장에는 가구를 고르는 노인, 옛 그릇을 찾는 젊은이, 장난감을 고르는 아이까지 여러 세대가 공존한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기가 쓰던 장난감과 작아진 옷을 판매하면서 물건의 가치와 소비의 의미, 환경 문제 등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 p.285, 「핀란드의 미래를 보는 창, 중고 문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