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 그릇된 길을 향해 걸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전승되는 이야기와 계시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길을 알려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예언의 말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 곁에서 길을 알려 주는 하느님의 이정표가 되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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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주지만,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명백한 구분은 이사야서 전체에 흐르는 중심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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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향한 구원의 드라마를 펼치기 위해 이사야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이사야서가 알려 주는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는 가운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이사 6,3)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의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의 “거룩하시다”라는 외침은 하느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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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6장에 이르는 대서사시인 이사야서는 짧은 머리글 이후에 전체 예언서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거대한 서곡을 들려줍니다. ‘심판(이사 1,2-31)과 구원(이사 2,1-5) - 심판(이사 2,6-4,1)과 구원(이사 4,2-6)’의 이중 구조로 구성된 서곡은 누가 심판의 대상이며, 또 어떻게 심판이 이뤄질 것인지 선포하면서, 예언서가 제시하는 구원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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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는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인 기원전 8세기의 고대 근동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참된 임금이신 하느님(이사 6,5)의 통치 아래 머무는 국가였을 뿐입니다. 하느님 심판의 도구일 뿐이었던 아시리아였지만(이사 10,5-6),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교만에 빠집니다(이사 10,12-14). 그러한 교만은 하느님 심판의 대상입니다(이사 2,10-18; 5,21). 이방 민족인 아시리아도 하느님 심판 앞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욕심으로 진행된 모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이사 10,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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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가 받은 소명은 독특합니다. 구원을 전해 주는 말씀이라기보다 신랄한 저주에 가깝게 들립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귀를 어둡게, 눈을 들러붙게 만들어,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해서 치유되지 못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예언자가 전해 주는 말씀을 듣습니다. 나에게는 그 말씀이 하느님의 치유를 향하게 이끌어 줍니까? 아니면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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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주님의 왕권은 세상의 임금들이 가진 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큰 힘을 지니고, 큰 권력을 지녔다 해도 세상의 임금들, 악의 세력이 가진 힘은 철저하게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힘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하느님께서 그 모든 악한 힘과 권력을 무력화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하느님의 왕권으로 장엄하게 선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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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임금으로 통치하는 세상은 이상적인 세상입니다. 세상이 이런 이상적인 세상이 되기 위해서, 곧 야훼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통치하시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잘못된 길로 이끄는 잘못된 통치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에프라임의 주정꾼들의 화관과 대조되는 화려한 화관은 바로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남은 자들을 위해 이러한 화관이 되어 주십니다(이사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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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과감해지는 아시리아 산헤립 임금의 조롱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한 히즈키야 임금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두 임금, 히즈키야와 산헤립은 유사한 행동을 취합니다. 히즈키야가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시리아의 산헤립 또한 자신의 신 니스룩의 신전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그곳에서 구원을 체험하지만 주님을 조롱한 산헤립은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이사 37,38). 주님을 향한 믿음은 구원으로, 주님을 조롱한 죗값은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 p.87
이제 유배 시기가 끝나가고 있음이 선포됩니다. 유배에 끌려갔던 야곱/이스라엘은 이제 주님께 다시 희망을 가져도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이사 40,26.28), 이스라엘을 위해서 역사 안에서 계획을 세우시는(이사 40,14) 거룩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이사 40,25). 그러기에 어떠한 신들도, 어떠한 세력들도 주님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이러한 위대한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야곱/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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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의 능률과 효과를 먼저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또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해 나가십니다. 강력하고 위대한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희생과 고통의 여정 속에서 구원이라는 값진 보석을 발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 p.135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는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한지, 또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지를 기준으로 하는 윤리적 공동체입니다. 이방인과 고자라 해도 이러한 윤리적 삶의 양식을 준수하고 지켜 낸다면, 율법이 정한 혈통의 기준에 벗어난다고 하여도 그들은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그들에게도 유효하다는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이 강조됩니다. 유다인의 입장에서 철저한 이방인인 우리가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제3 이사야서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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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의 시작은 시온에게서 주님의 도성이라는 위상을 찾아볼 수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 도시는 새롭게 탈바꿈합니다. 의인은 보이지 않고, 죄인만이 가득했으며, 주님 심판의 대상이기만 했던 시온은 새로운 희망이 실현되고, 주님의 뜻이 충만한 ‘정의의 도성’으로 변화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 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