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그리고 덕수궁, 두 개의 분관은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 도심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번잡한 도시의 현대적 마천루와 함께 공존하는 문화재 건축물들은 이곳이 오랜 시간 다져진 역사의 연속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기억에 관여하고 있음을 물리적으로 보여준다.
건축은 미래를 물리적 현재로 데려오는 기술이자 예술이다. 건축가들은 먼 미래를 상상하며 공간을 설계하고 실현한다. 그 공간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렇게 미래를 경험하게 되고, 떄묻은 건축의 형태들은 곧 역사의 흔적이 된다. 건축은 또한 권위의 상징이다. 주권자의 가치 체계에 따라 공간의 위계와 장식이 결정된다. 중앙 집권에서 민중으로의 권력 이동은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전시에 참여한 다섯 건축가 팀은 각기 주어진 공간에 대한 독특한 건축 실험을 했다. 이들의 작품은 역사적 공간이 담고 있는 시간을 나쁨의 방식으로 다루며, 그 권력을 시험대에 올린다. 높고 낮음, 투명함과 막힘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의 근대 문화 유산에 생동의 입김을 불어넣는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은 현대 건축가들의 유연한 건축술이 살아있는 문화 유산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여러 감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유구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작품들이 그려내는 새로운 풍경을 조우하고 그 특별한 시공간을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지희 『기억된 미래』」중에서
이런 관점에서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기억된 미래]가 주목하는 두 연도, 즉 고종황제가 승하한 1919년과 올해로 개관 50주년을 맞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설립된 1969년은 도시의 근대화와 탈바꿈이 지속되었던 한 세기를 대변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제작된 5점의 모든 작품이 단지 그 설치 장소(대부분이 덕수궁 주변에 설치)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지속되어 이루어지는 ‘모더니즘’이 남긴 업적과 아직도 진행 중인 이 과정에 대해 강한 감수성을 지닌 것을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모더니즘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으로서, 동양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서울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고유한 경험으로 다뤄진다. 이는 고전주의적 모더니즘에서 영감을 받아 인체 크기에 맞춰 제작된 씨엘쓰리의 의례적이면서도 도회적인 가구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건축이 공간에 대한 제 2의 천성으로 작동할 것을 상상하며 전시주제를 가장 시적으로 해석한 오비비에이가 이번 설치작업에서 보여준 다채로운 연속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달리 전통 장식의 유산을 첨단 기술을 통해 재해석한 스페이스 파퓰러가 선보인 광명문을 위한 설치 작업에서 건축은 진정으로 표상적 도구가 되는데, 이는 건축의 근본으로 회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가브리엘레 마스트리글리 『기계 속의 삶 ― 건축, 유산, 대도시』」중에서
덕수궁은 서울에 있는 다섯 궁궐중 하나지만, 규모나 정통성 측면에서 경복궁, 아름다움 측면에서 보면 창덕궁에 비교할 수 있는 규모나 아름다움을 가진 궁궐이 아니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덕수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규모로 보면 경복궁에 비할 바 없이 작고, 창덕궁처럼 아름다운 전각이나 후원도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덕수궁은 다른 4개의 궁궐과 달리 ‘고궁이 아닌 근대궁궐’이라는 점. 그리고 도시와 호흡하며 도시의 변화가 궁궐에 그리고 궁궐의 변화가 도시에 직접적으로 연계 되어 반응하는 궁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덕수궁의 정체성을 대비적으로 표현한 프로젝트가 OBBA의 작업과 뷰로 스펙타큘러의 작업이다. 덕수궁은 작은 궁궐이지만 2개의 정전을 가진 궁궐이다. 하나는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을 가진 석조전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 형식의 정전인 중화전이다. OBBA와 뷰로 스펙타큘러의 프로젝트는 상반된 성격의 정전을 배경으로 하는 작업이다.
--- 「안창모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중에서
덕수궁은 전환기에 세상에 직면했던 용기 있는 황제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로서,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였던 고종이 살았던 곳이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중첩과 전환의 과도기를 겪었다. 그는 왕에서 황제로 즉위하였고, 나라 안을 향했던 사고는 서구를 향해 개방하였다. 대한제국의 현대화와 산업화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 문제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야 했다. 또한, 안정과 견고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와중에도 전환과 변위의 불안정이 공존하는 삶을 살았다.
덕수궁의 도면을 살펴보면 두 개의 축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중화전으로 이어지는 의례의 축이며, 그보다 덜 공식적인 다른 축은 함녕전으로 이어진다. 함녕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주로 쓰였지만 고위 관원들과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 「씨엘쓰리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