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입양해 주세요.”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의 눈이 아까보다 커지고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생전 처음 듣는 황당한 제안이었다. 제 아들들과 계약 결혼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 허무맹랑한 영애들을 몇 명 보긴 했지만, 그녀들을 가뿐히 뛰어넘는 제안에 셀바토르 공작은 헛웃음까지 흘릴 뻔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는 후작가의 딸이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셀바토르 공작에게 레슬리는 한 번 더 말을 꺼냈다.
“저를 셀바토르 공작가의 유일한 공녀로 만들어 주세요.”
만약 이런 제안을 들은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전부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를 쫓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저 말없이 레슬리의 라일락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 뭔가를 결심한 저 눈은 셀바토르 공작도 잘 알고 있는 눈이었다. 더는 피할 곳 없는 궁지에 몰린 자가 살아남고 싶어 발버둥 치는 눈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할까?”
“그러면 공작님이 원하시는 걸 손에 넣으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쿠웅!
거대한 굉음과 함께 찾아온 칠흑 같은 어둠이 공작저를 감싸 안았다. 여기저기서 작은 비명이 터지고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빛내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둠, 어둠, 어둠.
특히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응접실은 레슬리와 셀바토르 공작만 보일 정도로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은 이 힘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둠술사!’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누르지 못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어둠술사는 건국 때나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때는 셀바토르 공작가와 견줄 만큼 강력했지만 이제는 그 힘을 받은 자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귀한 어둠술사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
“제국, 아니 대륙 최고의 어둠술사를 얻으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레슬리가 눈을 감자, 공작저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 「1권」 중에서
“지금 도망치는 거야?”
그 말 한마디가 발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텐데.
레슬리는 고개를 휙 돌려 엘리를 바라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놀랍네. 용케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너무 놀라워. 내가 아는 너라면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엘리가 입꼬리를 뒤틀려 웃어 보였다. 어딘가 패를 숨긴 듯한 얼굴에 레슬리는 눈가를 움찔거렸다.
“내가 누구 좋아하라고? 미쳤니?”
“응, 내가 보기엔 너 미친것 같네. 더 할 말 없어.”
다시 몸을 돌리자, 엘리가 거칠게 레슬리의 팔목을 낚아챘다.
“야, 너…….”
“무례를 저지르지 마세요, 스페라도 영애.”
일부러 레슬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목소리를 키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물론, 멀리서 이야기하던 펠론과 다른 기사의 시선도 세 사람에게 닿았다.
“……지금 공녀가 됐다고 유세를 부리나 본데.”
“유세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겁니다. 제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요? 나는 이제 이 제국의 유일한 공녀라고.”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거칠게 엘리의 팔을 쳐 냈다. 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레슬리는 덤덤하게 냉담한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셀바토르 공작가로 편지를 보내 약속을 잡으세요. 무례하게 이렇게 사람을 불러 세우지 말고. 그리고 스페라도 영애는 제대로 인사를 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모양이에요. 가장 기초적인 예법서에도 나와 있는 예절인데.”
그제야 레슬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서렸다. 평소의 웃음이 아니라 명백한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 엘리의 지식은 레슬리였으니까. 엘리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와 같은 상태였다.
지나가던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그리고 펠론과 기사 한 명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까득. 작게 이를 간 엘리는 고개를 되레 치켜세우더니 레슬리에게 속삭였다.
“네가 언제까지 그 가짜 공녀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셀바토르 공작의 보호 아래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잊지 마렴.”
갑자기 엘리는 레슬리를 보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때마침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마치 성자처럼 엘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레슬리에게 속삭이는 말은 너무도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아무리 네가 셀바토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포장을 해도, 네 몸에 흐르고 있는 피는 스페라도 가문의 것. 네가 그렇게 외치던 살인마들의 피란 말이야. 그 피를 언제까지 네가 숨길 수 있을까?”
후후. 다시 작은 웃음을 흘리며 이번엔 엘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언제까지라 생각하시나요, 셀바토르 공녀님?”
왜 ‘셀바토르 공녀님’이라는 말이 레슬리 귀에는 가짜라고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2권」 중에서
“저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셀바토르 공작이신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이 이름을 주셨고, 그건 다른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니지요. 아무리 고귀한 피라고 해도 말이죠.”
황족이든 아니든, 자신은 셀바토르 공작가의 일원이며 그 사실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레슬리의 말에 아렌도는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불과 4년 전이었다. 4년 전만 해도 바닥을 기던 아이가 이젠 자신과 시선을 맞추며 어딘가 거슬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제 동생이 이런 표정을 자주 지었지. 자신은 끝까지 꺾이지 않겠다는 표정. 제 아버지와 닮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짓밟아 보고, 가져 보고, 주지 않겠다면 빼앗아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변하셨군요. 저는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아렌도는 손을 뻗었다. 레슬리의 의사 따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 생각을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셀바토르 공녀님.”
레슬리가 그 손을 쳐 내기도 전에 누군가가 아렌도의 팔을 잡았고 그를 제지했다.
“감사합니다, 황자님.”
아렌도가 고개를 돌리자,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을 한 콘라드가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 머리는 반만 뒤로 넘기고, 금색으로 수가 놓인 검은 재킷 안에는 짙은 회색빛의 투 버튼 조끼를 입고 있었다. 셔츠에는 화려한 문양의 카라링스를 달고 있었는데, 커프스와 한 세트인 듯, 라일락빛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와…….’
늘 입던 성기사단 제복이 아니라서 그럴까. 어쩐지 너무 달라 보여 레슬리는 잠시 화도 잊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아 보였다.
잠시 레슬리와 시선을 마주친 콘라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없는 사이 제 파트너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고 계셨군요.”
여전히 그의 팔을 움켜잡은 채 콘라드는 여느 때와 같은 밝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하, 아우님의 파트너였군.”
아렌도는 그런 콘라드의 눈동자를 지척에서 바라보며 쭉 찢어진 눈을 휘었다. 그의 푸른빛 눈동자가 기억을 더듬듯 살짝 양옆으로 움직였다.
“그래, 셀바토르 마법사님과 인연이 있었지.”
“예, 덕분에 레슬리 양과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셀바토르 공녀라고 예의를 차려 말하던 콘라드는 이번에 레슬리라고 이름을 부르며 더욱 밝게 웃었다. 하지만 황금빛 눈동자는 전혀 웃음을 띠지 않은 채 아렌도를 응시했다.
“흐음. 내가 마법사님과 친분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런가, 아우님?”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형님.”
아렌도가 말하는 아우님의 호칭에 따라 콘라드 역시 형님이라는, 친근하게 들리는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아 그 호칭은 차갑게 들렸다.
--- 「3권」 중에서
아까부터 찾고 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러는 사이 음악이 바뀌었다.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는 곡으로 레슬리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추고 싶은 곡이기도 했다.
“슈야.”
누군가가 레슬리의 팔을 잡았다. 콘라드였다. 오늘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복이 아닌 검은 정복에 붉은 망토를 두른 상태였다. 이제 어릴 적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장한 콘라드.
“제 약혼녀께 춤을 신청하고 싶은데요.”
콘라드는 눈을 휘며 레슬리의 손끝에 작게 키스했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전에는 손끝만 닿아도 부끄러워서 붉어지던 그였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걸까.
“네, 좋아요.”
레슬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콘라드가 자연스레 허리를 팔을 감고 홀 중앙으로 걸었다. 이미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와 함께 시선들이 두 사람에게 모였다.
“라드.”
콘라드의 손을 꼭 잡은 레슬리가 웃었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면서도, 레슬리가 웃으니 그녀를 따라 콘라드의 입술이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시선이 따갑지 않으신가요?”
사람들 사이에는 셀바토르 공작과 베스라온, 루엔티 그리고 사이레인도 섞여 있었다. 거기다 셀바토르 사용인들과 기사들까지. 레슬리의 장난기 섞인 웃음에 콘라드가 작게 끙, 소리를 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요? 하지만 이젠 버틸 만합니다.”
춤에 맞춰 가볍게 레슬리를 들어 빙글 돌리면서 콘라드가 말을 이었다.
“이런 것도 버티지 못한다면 슈야 옆에 있지 못하잖아요.”
엉겁결에 조금 더 거리가 좁혀졌다. 레슬리는 바로 코앞에서 콘라드가 눈을 휘며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소를 머금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쩐지 부끄러워 레슬리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에서 콘라드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콘라드의 품에 안긴 채 레슬리가 입을 열었다.
“아까 루엔티 오라버니와 첫 춤을 춰서 기분 나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요.”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레슬리가 고개를 들어 콘라드를 바라보자, 그의 미소에는 거짓이 없었다.
“앞으로는 제가 슈야의 첫 번째가 될 테니까요.”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행복한 미래를 보는 듯 반짝이며 빛이 났다.
“앞으로는 춤을 추는 것도, 새로 열린 연극을 보는 것도, 낯선 곳에 가는 것도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것도.”
콘라드의 한쪽 손이 레슬리의 뺨을 쓸었다. 그 손길에는, 그리고 레슬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랑스러움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전부 저랑 처음으로 하실 테니까요.”
--- 「4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