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령조」와 「누란」
윤 후 명 소설가
내가 김춘수 시인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시 「타령조(打令調)」 를 읽고서였다. 물론 그는 많은 시를 썼고 그 가운데「꽃」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나는 시를 공부하면서「타령조」에 빠져들었다. 「타령조」도 여러 편인데, 「타령조 10」을 읽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세반도(伊勢半島)에서 온 오토미,/ 네 말을 빌리면/ 지형이/ 태평양을 바라고 기어가는 거북이 모양인 밀감밭에서/ 밀감은 따지 않고/ 바다에만 먼눈을 팔다가 일터를 쫓겨난 오토미,/ 빠 쿠로네꼬의 여급이 된 지/ 채 열흘이 안 되는 오토미,/ 오토미의 손등은 나이보다 늙고 꺼칠했지만,/ 오토미의 볼과 이마는 이세반도의 밀감밭의/ 밝은 밀감빛이었다고 할까,/ 나이 열다섯만 되면 마음이 익는다는/ 이세반도에서 온 열아홉 살 오토미의 눈에는/ 그 커단 눈에는/태평양보다는 훨씬 적지만/ 바다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오토미, 너는 모를 것이다./ 그로부터 일 년 뒤/ 세다가야 등화 관제한 하숙방에서/ 시도 못 쓰고 있는 나를/ 한국인 헌병보가 와서 붙들어 갔다./오토미, 참 희한한 일도 있다./ 어젯밤 꿈에/ 이십 년 전 네가 날 찾아왔더구나,/ 슬픔을 모르는 네 커단 두 눈에는/ 태평양보다는 훨씬 적지만/ 바다가 여전히 너울거리고 있었다.
좀 긴 인용이 되고 말았어도 시인을 얘기하는 방법으로 나는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세반도의 밀감밭에서 온 빠 쿠로네코의 여급 오토미가 시인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시인의 연보를 보면 1940년 일본대학 예술학원에 입학했다가 2년 뒤 일본의 총독 정치를 비방했다고 붙잡혀 세다가야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혔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그때 붙잡혀간 일이 이 시에 적혀 있으며, 이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꿈속에 여전히 두 눈에 바다가 너울거리는 그녀가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그 인연이 매우 아름답고 공교롭다고 여겼다. 그로부터 나는 도쿄에서 가깝다는 이세반도를 꼭 가보고 싶었고, 쿠로네코, 즉 검은 고양이라는 이름의 술집에도 들러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세반도에도, 검은 고양이 술집에도 가보지를 못했다. 언젠가 도쿄의 거리에서 코네코, 즉 작은 고양이라는 술집을 발견하고 무작정 기어들어가 맥주를 마신 것은 그 연상 작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시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막상 시인과의 첫 대면은 그로부터 훨씬 늦은 80년대의 어느 날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프레스센터에 갔다가 시인을 만난 나는 그제서야 인사를 올렸다. 시인은 내 소설에 그의 시가 인용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란(樓蘭)의 사랑」이라는 단편은 뒷부분에 그의 시 「누란」 가운데 ‘명사산(鳴砂山)’을 인용함으로써 결말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명사산 저쪽에는 십년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
그런데 여기 인용한 구절은 본래 시에서 가운데 몇 줄을 내 의도대로 생략한 것이었다.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와‘언제 시들지도’ 사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봄을 모르는 꽃, 삭운(朔雲) 백초련(白草蓮), 서기 기원전 백이십
년, 호(胡)의 한 부족이 그 곳에 호(戶) 천오백칠십, 구(口) 만사천백,
승병(勝兵) 이천구백십이 갑(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내가 의도적으로 빼버린 구절은 상당히 어렵고, 또 내 소설에는 그리 역할을 못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시에서는 묘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다. 시인은 내 소설을 잘 읽었다고 말하면서도, 그 부분을 생략한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죄송해서“네, 네. ”
하고만 있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모임에서 시인을 뵐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인사만 올렸을 뿐 외곽을 빙빙 돌았다. 병실에 누우셨다는 말에도 차일피일하다가 그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 시 공부의 중요한 시기를 점하셨는데…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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