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숨소리와 함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까지 귓가에 울릴수록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거친 숨을 연방 내뱉으며 공원 바닥에 주저앉아 허공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제 겨우 청소년 딱지를 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결혼이라니! 6년의 압박과 설움에서 이제 겨우 자유라는 것을 만끽해 보려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선배들과의 술자리이며 자유로운 머리염색, 그리고 이번 여름방학 때 계획했던 전국일주까지. 그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리게 될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으악! 강현명, 살려줘!”
대뜸 돼지 멱따는 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일제히 현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원에 모여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이 강현명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혹시 정신이 이상해서 머리에 노란 꽃을 달고 시부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은 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여유가 현명에게는 전혀 없었다.
“어휴, 내가 미쳐요. 혹시, 할아버지가 노망드신 건 아닐까?”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으며 현명은 정확히 삼 일 전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차디찬 글라스에 빠알간 립스틱…… 술잔을 부딪치며 찬! 찬! 찬! 아싸, 음정, 박자 맞고!”
얼큰하게 취하면 절로 입안에서 흥얼거리는 트로트가 현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입안에서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릴 정도로 노래가 점점 높여져 가는 주벽이 있었다.
“차디찬 글라스에 빠알간 립스틱, 어쩌고저쩌고…… 술잔을 부딪치면 찬! 찬! 찬!”
똑같은 가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현명은 뭐가 좋은지 실없이 배시시 웃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막 빠져나온 그녀였다.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계실 할아버지만 안 계셨다면 현명은 술자리가 파장할 때까지 있었을 것이다.
“에이, 좀만 더 있다 올 걸.”
현명은 입맛을 다시는 쩝쩝 소리까지 내며 일찍 빠져나온 술자리에 못내 아쉬움을 털어 버리지 못했다.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른 현명은 입을 오므리고 숨을 깊게 몇 번이고 내뱉고서야 열쇠로 대문을 열고 도둑고양이처럼 민첩하고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쏙 들어갔다.
술집에서 집에까지 오는 내내 할아버지가 주무시길 그렇게도 빌던 그녀의 소원을 신께서 들어주시기라도 하듯 집안은 컴컴한 암흑으로 뒤덮여져 있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걸어가던 현명은 할아버지의 방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에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강현명! 당장, 들어오너라!”
현명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잔뜩 긴장했다.
순간, 그녀는 정신이 맑아지면서 이 위기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헤쳐 나가기 위한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정신 차려, 강현명! 너는 지금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거야. 자, 호랑이를 잡으러 가보자고!’
무슨 사냥꾼이라도 된 듯 현명은 가슴을 쓱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탁탁 치고는 할아버지 방으로 단걸음에 들어갔다.
“설마 이 시간까지 네가 공부는 하지 않았을 테고, 냄새를 맡아 보니 또 술을 마신 모양이구나? 요즘 대학에서는 가르치라는 공부는 안 가르치고 술 마시는 것만 가르치느냐?”
당당히 방안으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현명은 그저 이 순간만 어떻게든 모면하기 위해 공손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오늘만큼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이 정도에서 끝나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으나, 역시나 하늘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강진석 옹의 말에 현명은 두 눈을 감아버렸다.
“네가 이러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돌아가신 네 부모가 보면 아주 좋아하시겠구나! 이 할아비는 너를 부모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제껏 노력해 왔다. 그런데 네가 이 할아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작정이냐? 아니면, 이 할아비한테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현명에게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강진석 옹은 잠시 말을 끊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없는 현명을 바라보며 그는 마땅치 않은 듯 끌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내, 너를 대학에 괜히 보냈어. 남에게 뒤떨어지지 말라고 대학에 보내놨더니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질 않나……. 쯧쯧, 아무래도 내가 널 잘못 키운 모양이구나. 저 세상에 가서 네 부모에게 큰소리치지도 못하겠다.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현명은 그제야 슬며시 고개를 들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열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할아버지는 언제고 저 세상에 가면 네 부모에게 큰소리 칠 정도로 잘 커달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학교에서 상을 받아올 때도, 성적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때도 시원스럽고 우렁찬 웃음을 지으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도 호탕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늙어 보이시는 걸까? 할아버지에게 그저 죄송스런 현명은 절로 숙여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이제부터 일찍 들어올게요. 아직 학기 초라서 술자리가 많아서 그런 거니까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네?”
“강현명!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말대꾸를 해? 내가 그리 가르쳤더냐? 곧 죽어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지? 술이나 먹으라고 내가 비싼 학비를 대주는 줄 아느냐? 그렇게 하려면 당장이라도 그만 둬!”
할아버지의 호통소리에 현명은 죄스러운 마음은 차츰 옅어지면서 고개를 숙이던 반발심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지금 당장 죽어도 하고픈 말은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명이었다.
“할아버지,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나이라고요.”
“뭐? ……성인?”
눈을 부릅뜬 채 호통을 치는 강진석 옹의 반응에도 현명은 굴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를 설득시키기 위해 한 무릎 다가갔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께 걱정 끼쳐드리지 않도록 성인답게 앞으로 잘 하겠다는 말이죠.”
종알종알 잘도 말을 하는 현명을 바라보고 있던 강진석 옹은 갑작스레 서글퍼졌다. 언제 저렇게 벌써 커버렸을까. 부모의 산소 앞에서 눈물, 콧물 흘릴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 어린 것이 벌써 성인이라니…….
강진석 옹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소리와 함께 덤덤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성인이란 말이지? 그럼, 결혼을 해도 이른 나이는 아니겠구나.”
“그럼요, 보호자의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는 나이는 훨씬 지났죠. 고등학교 동창생 중에는 벌써 아기를 낳아서…….”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를 치던 현명은 이상한 낌새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이 꺼림칙한 느낌은 뭐지?’
강진석 옹의 눈치를 살피며 현명은 마치 명탐정 콜롬보라도 된 듯 코를 끙끙거렸다.
“네 말마따나 성인이 되었으니 결혼을 해서 이 할아비한테서 독립을 해야겠구나?”
“하, 할아버지! 결혼이라뇨? 아직 저는 결혼하기에는 어려요!”
“어리다니? 좀 전에는 나한테 성인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이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면 못 쓴다.”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꽃다운 스무 살에 결혼이라니? 연애는 고사하고 남자하고 손가락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남자가 어디 있어서 결혼을 한단 말인가! 꽃이 피기도 전에 이대로 저버릴 수는 없었다.
현명은 콧구멍을 벌렁거린 채 큰 눈을 깜빡거렸다.
“할아버지, 갑자기 결혼이라뇨? 저는 성인이 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이지, 결혼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결혼은 저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저한테 남자가 어디 있어요? 제가 나중에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생기면 그때, 할아버지한테 데리고 올게요.”
“너는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 이 할아비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할아버지!”
“왜 불러대? 다 컸다는 녀석이 술 냄새나 풍기고 다녀? 쯧쯧, 며칠 후에 네 신랑 될 놈을 데리고 올 테니까 넌 그리 알고 가서 자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강진석 옹은 현명이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펼쳐진 이불 속으로 홱 들어가 벽을 향해 돌아누워 버렸다.
현명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두 눈을 끔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의 방에 들어온 현명은 갑작스럽게 결혼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듯 연방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린 듯 어떠한 생각도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현명은 그 모든 것이 다 흉몽을 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져 버린 것일까?
스무 살의 생일이 지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다. 정말 할아버지는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꽃을 시들게 만들 작정이실까? 말 한마디를 잘못 했다고 결혼을 하라는 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가 아니고 뭐겠는가! 이 모든 것은 필시 하루라도 빨리 결혼시켜서 귀찮은 손녀딸에게서 벗어나고픈 할아버지의 계략이었다.
현명은 이를 악물고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할아버지의 뜻대로 절대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도 이 모든 것이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신에게 비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할아버지께서 앞으로도 쭉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기를 빌고 또 빌겠습니다. 제발, 강현명을 버리지 말아주소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