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다. 우리 미미가 좋아하겠다, 그치?”
아이의 물음에 계집애는 흙 묻은 두 손바닥을 마주 털면서 웃었다. 계집애의 입가에 그려진 흙 자국들이 마치 미미의 수염 같았다. 그제야 아이는 계집애의 이름을 물었다.
“다빈, 유다빈. 다섯 살이야.”
아직 흙이 다 털리지 않은, 손바닥을 활짝 펴며 묻지도 않은 나이까지 말했다. 그런 다음 그 손으로 스웨터앞자락을 만지려 했다. 아이도 제 이름이 오빛나고, 열다섯 살이라고 말하려다가 급하게 계집애의 손을 잡았다. 계집애의 흰 스웨터에는 여기저기 흙 자국들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그것들을 털어주면서 미미의 털을 쓰다듬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스웨터에 얼굴을 갖다 대고 비볐다. 아아, 간지러워. 계집애는 잽싸게 몸을 빼어 저만치 뛰어가면서 소리쳤다.
“놀이터에 가자.”
아이도 놀이터를 향해 달려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미미의 무덤 위에 수많은 꽃들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새로 피어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저 속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 미미. 아이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 결국 여기로 다시 돌아올 때의 그 비참한 기분에서 조금은 놓여난 듯했다.
--- 「그 아이 이름은 빛나였다」 중에서
화면은 순간 환한 빛을 내뿜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몸을 가누며 붉은 불꽃으로 일어나고 있다. 번쩍이는 섬광과 아우성을 내지르며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피어오른다. 무엇이 두려우랴? 그 어떤 것이든 다 없애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믿고서 불 속으로 던져버린 고통들, 그리고 찾아온 소멸의 편안함. 자신도 모르게 지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불꽃이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전까지 앵커는 사뭇 의미심장한 투로 어처구니없이 저지른 방화에 대해 말하다가, 곧 어조를 바꾸어 일본과의 친선경기에서 이긴 우리의 축구팀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어 텔레비전수상기 옆에 놓인 선인장화분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멕시코, 브라질, 애리조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산지가 각각인 그것들은 모양새도 갖가지다. 공 모양, 기둥 모양, 로제트 형, 조상 형……. 보험설계사로 이십 년을 보냈던 어머니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회의를 느낄 때면 보험회사를 때려치우는 대신 선인장화분을 하나씩 사오곤 했다. 지수는 새로운 화분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의 몸속에서 가시들이 조금씩 더 돋아난다고 믿었었다. 하지만임종 직전, 어머니의 몸에서 지수가 보았던 것은 가시가 아니라 앙상한 뼈들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의 가시들을 어머니는 살아남기 위해 더욱 깊숙이 뼛속에 감추어두었던 걸까? 요즘 들어 지수는 어머니가 남긴 선인장들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에 가시들이 와 박히는 아픔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곤 한다. 어느 새 앵커는 뉴스보도를 마치고 편안한 밤이 되시라는, 인사말과 함께 고개 숙였다. 지수는 텔레비전도 전등도 다 껐다.
--- 「불꽃선인장」 중에서
“맘만 먹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가지, 왜 못 가겠어?”
“그럼 한번 다녀오시지 그래요?”
이웃동네에 잠시 나들이 가듯 가볍게 다녀오라는 투로 말하면서도 얼마나 불가능한 일을 권하고 있는가를 나는 잘 알았다. 할머니의 대소변수발과 잠시도 틈을 낼 수 없는 집안일들을 하루쯤 접어두고 저 멀리 남쪽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꽃 잔치에 갈 만큼 어머니는 배짱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다. 그러면서 언제든지 마음만 내면 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어머니도 참.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젠 엄두가 안 나.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면 얼마나 속상하고 안타깝겠어? 내가 이젠 늙나 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립기만 했는데…….”
그때 열여덟이었던 나는 찰나적인 아름다움이 남기는 슬픔 따위를 알지 못했다. 단지 어머니의 말대로 눈가에 잡히는 주름을 보고 잠시의 휴식도 허락 받지 못하고 늙어가는 모습이 안 돼 보였을 뿐이었다. 이제 화운으로 가면 머리 위에 벚꽃을 눈송이처럼 달고 환한 웃음을 날리는, 젊고 건강한 어머니를 그려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죽음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어머니의 발을 꼭 붙잡을 기운을 나는 충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오는 죽음과 내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부터 하루쯤 놓여나기를 내심 원해서인지도 모른다.
--- 「사월의 전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