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단 하나의 딸인 나는, 36년 동안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깨물지 않아도 지금껏 아픈 손가락이다.
나는 오래도록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해왔지만, 이 책만은 피하고 싶었다. 원고를 받아들고도 한동안 읽지 않았다. 엄마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당신의 삶을 쓰신 글로 책을 만드는 이 일은 진정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풀어내신 그 상황에 내 마음이 휘둘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원칙을 세웠다.
담담하기.
엄마가 쓰신 글을 읽고, 교열하고 편집하면서, 담담해지도록, 나의 감정은 거기에 싣지 않도록 무던히 애썼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
엄마의 삶이 여기 있다. 엄마의 삶의 계절은 겨울이다.
겨울은 불모의 혹한만이 아니다.
따뜻함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안으로 안으로 더 당겨앉게 한다.
엄마의 이 책은 장작불 활활 타는 아궁이, 밤새 식지 않는 화롯불 같다. 엄혹한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 화롯불에 둘러앉아 인절미 구워 먹으며 나누는 정다운 이야기꽃 같다.
겨울나무는 앙상한 빈가지인 듯 보이지만, 그 여린 가지에 잎눈이 있고 꽃눈이
숨 쉬며 새봄의 꿈을 꾸고 있다. 엄마의 이 책도 우리의 뒤를 이어갈 생명에게
예쁘고 튼튼한 새봄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엄마의 딸로 65년을 살아오면서, 내가 세 손자의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 엄마는 더 바랄 수 없이 모든 것을 베풀어주셨다.
나는 오늘도 그 사랑과 헌신을 누리며 살고 있다.
모든 지난 일들이 감사이고, 매일이 감사의 연속이다.
--- pp.246-247
할머니는 내 삶 깊숙이 스며들어 일상에서 항상 이야기 걸어주시는 내 추억의 친구다.
어린 시절 이불에 뉘어놓고 해주시던 재미난 할머니표 옛날 이야기, ‘다람쥐가 도토리 도시락을 싸서 소풍가는 이야기’를 나는 지금 내 아이들에게 해주고 있다.
결혼을 하고 가족들 빨래를 할 때마다 늘 깨끗고 반듯하던 할머니의 빨래가 생각난다. 항상 주름하나 없이 곱게 풀 먹이고 예쁘게 다림질해 새벽같이 갖다 주시던 할머니. 그래서 빨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집안일이다. 빨래를 개는 시간 동안 할머니의 손길에 내 마음이 반듯하게 다려진다.
내 옷이 어디라도 고쳐야 하면 금세 새옷으로 만들어주시던 할머니, 이제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아이들의 옷을 고칠 때마다 아이들의 이 귀여운 옷에 내 손길이 닿았음을 행복해하며 할머니를 떠올린다. 항상 내 옷을 소중히 다루시며 내 옷을 고쳐주실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어린 나의 앞머리를 늘 예쁘게 잘라주셨던 할머니, 서율이의 머리카락을 잘라줄 때마다 내 마음이 기억하는 할머니의 손길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엄마가 할머니의 재봉틀을 추억하고 싶어 하신다면, 나는 할머니께서 내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던 그 크고 투박한 검정색 가위가 그립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분이시다. 항상 스무 살처럼 꿈을 꾸시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늘 눈빛이 빛나신다.
내게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면 나보다 더 기뻐하시느라 할머니 눈빛이 즐거움으로 빛나고 멀리 사는 나와 작별할 때면 매번 그때가 마지막 인사인 것처럼 할머니 눈은 아쉬운 눈물로 가득 찬다.
멀리 있지만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할머니께 더 가까이있다.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마음에 간직한 사랑이 많아 늘 포근하다.
할머니의 경동시장 사랑으로 계절마다 다른 맛있는 나물 반찬을 먹는 행운을 누렸다. 엄마는 미국에 오실 때마다 할머니가 담그신 배추김치와 총각김치를 가져오신다. 세상에 없는 특별한 맛이다. 우리 할머니의 손맛은 변함없으시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가장 그리워하는 맛. 할머니표 호박잎쌈과 강된장, 깻잎과 가지나물, 꼬막!
아흔이 넘으신 나이에도 항상 스무 살처럼 꿈꾸시는 우리 할머니, 이 책이 빨리 세상에 나와서 친지분들과 지난 세월의 이야기도 즐겁게 하셨으면 좋겠다. 그 즐거움으로 할머니가 매일매일 더 건강해지셔서 또 새로운 꿈을 꾸시고, 꿈꾸시는 모든 일들을 다 이루시기를, 그리고 우리 곁에 늘 함께 계시기를 소망한다.
--- pp.241-243
그 후 어린 세 동생만 데리고 사는데 나마저 피난을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네 살짜리 상덕이를 등에 업고 트렁크를 하나 인 채 두 동생은 걷게 했다. 낮에는 못가고 공습을 피해 어둡기를 기다려 한밤에 그 무섭고 험하기로 이름난 범머리고개를 넘었다. 도대체 네 살 사내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무거운 트렁크를 이고 험한 산고개를 넘다니, 그것도 칠흑 같은 밤중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공암에서 사움말 70리를 걸어갔다. 그렇게 범머리고개를 넘어 벌판길을 가는데 날이 밝아 힘도 들고 더는 못 가겠기에 밭 가운데 초라한 농가를 발견하고 찾아 들어가니 할머니가 들어오라고 하시며 반겨주었다. 앳된 처녀가 커다란 아기를 업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이른 아침 이슬밭을 헤집고 오는 모습에 할머니는 사연을 물으며 밥을 해서 우리를 먹여주셨다. 그때 깻잎을 쪄서 주었는데 내 생전엔 못 잊을 맛이다. 생명의 은인이시다.
그렇게 사움말에 갔는데 거기서 며칠이나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인민군들의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는 소식이 산골마을에 퍼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 공암으로 가도 된단다.
집으로 와 보니 말문이 막힌다. 아버지의 공간(병원과 한약장 등을 취급하는 공간)은 치안대의 사무실로, 안방 어머니의 공간은 여성동맹의 사무실로, 부엌, 사랑채 할 것 없이 난장판이었다. 돼지 삶아 먹은 흔적이 난자했고, 장독대의 그 맛있는 간장 고추장은 다 퍼먹고, 우리 살림은 흔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토지 개혁을 한다고 우리 논에 얼기설기 줄을 쳐 표시해 놓았다.
이 상황에서 두 남동생은 돌아왔는데, 오빠는 부산으로 내려갔다는 소식 뿐 알 길이
없었다. 아버지와 대전 형무소에서 같이 지내셨다는 분은 살아서 돌아왔는데 우리
아버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고 애만 태웠다. 다행히 임시 치안을 담당한 직원이 속속 뉴스를 우리 집에 전해주고 도움을 주었다. 대전형무소 우물은 수도시설이 없던 그 시절 넓고 깊기로 유명했다. 둘레는 말할 것도 없고 깊이는 10여 미터 이상이란다. 그런데 시체가 수북이 우물 위까지 쌓여 있었단다. 산사람을 엮어 무더기로 쑤셔넣고 마지막에 총살했단다. 생사가 확인 안 된 가족,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의 입회하에 우물 속 시신을 끌어올리는데 어머니와 열일곱 살 은영이는 몇 날 며칠을 아버지 유해를 찾느라 아수라장 같은 집안은 돌아볼 엄두도 못 내고 헤매셨다.
시신을 건져 바닥에 놓으면 너도 나도 자기 가족 찾느라 이리저리 헤치며 짓밟았다. 여름이라 형체도 몰라보리만큼 부패해서 악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시고 은영이와 녹초가 되어 돌아오기를 수없이 계속하셨다. 어머니는 집안을 어떻게 수습해서 우리들을 살게 하셨는지 7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영혼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떠도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만 갔다.
--- pp.5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