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우리도 여친 만들자. 우리 반에 여친 있는 애들 꽤 많아.”
“그래, 좋아. 우리가 어디가 어떻다고”
우진이의 말에 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고, 순식간에 우리는 ‘곧 여친 생길 놈’들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너희들, 좋아하거나 사귀고 싶은 여자애 있어”
석준이의 질문이 저쪽 희망의 나라로 향하려던 내 발목을 잡아채 원래 있던 자리로 끌고 왔다.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한 번도 우리 반 여자애들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우리 반 여자애들 이름도 다 못 외웠다.
“그러는 넌”
우진이가 석준이를 쳐다보며 묻자, 석준이는 약간 우물쭈물하며 찾아볼 거라고 대꾸했다.
“그럼 우리 내기할래? 누가 먼저 여자친구 사귀는지”
우진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의견을 내놓았다.
“무슨 그런 걸로 내기를 하냐”
석준이는 싫다고 했지만 난 괜찮은 생각 같았다. 내기를 하면 승부욕이 생겨 더 열심히 할 테니까.
“난 안 할래.”
역시 모범생 석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절대 하기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
“너, 내기에서 이길 자신 없으니까 그렇지? 나나 침이 먼저 여친 사귈까 봐”
우진이가 슬슬 석준이의 약을 올렸다. 석준이는 넘어오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덥석 우진이의 미끼를 물었다.
“야, 누가 질 것 같아서 그렇대? 그래, 하자. 해!” ---pp. 25~26
“도대체 누구냐고”
우리 반 여자애들 이름을 거의 다 말하고 나서도 석준이가 말을 하지 않자 우진이가 화를 냈다.
“박민지야.”
석준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 박민지”
나와 우진이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설마 그 박민지? 다른 박민지 있는 거 아니지”
나와 우진이가 큰 소리로 말하자, 석준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진짜, 진짜 박민지야? 이민지 말고 박민지”
석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반에는 민지가 두 명 있다. 석준이와 어울리는 건 ‘박’이 아니라 ‘이’였다. 박민지는 한준범 부류다. 예쁜 걸로는 전교에서 손꼽힐 정도지만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고, 수업 시간에도 딴짓 하기 일쑤에 신경 쓰는 거라고는 멋 부리기밖에 없다. 한마디로 민지는 ‘노는 애’였다.
“야, 박민지가 예쁘기는 하지만 이건 아니야. 너랑 걔는 너무 안 어울려.”
우진이가 방방 뛰며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다. 내 생각에도 석준이와 박민지는 영 아니다. 둘은 극과 극이다.
“너 그럼 걔랑 사귀고 싶어”
내가 묻자 입을 꾹 다문 석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러면 너 절대 여자친구 못 사귀어. 대상을 바꿔. 박민지는 아무래도 아니야. 걔는 절대 너 좋아할 리 없어.” ---pp. 65~66
석준이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고 난 모르면서 아는 척을 했다.
“아, 정말 궁금해 죽겠네. 키스했을까? 안 했을까”
우진이가 석준이에게 달려가 이야기 좀 해 달라고 매달렸다. 난 안 듣는 척했지만 혹시나 석준이가 이야기를 해 줄까 봐 귀를 쫑긋 세운 후 둘의 뒤를 따라갔다.
피자를 먹은 후 아이들과 헤어졌다. 셋이 PC방이라도 가려고 했지만 석준이는 얼른 미용실에 갔다가 민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우진이는 석준이에게 어떻게 우정보다 사랑을 택할 수가 있느냐며 화를 냈다. 하지만 석준이는 실실 웃기만 했다. 결국 우진이와 나도 별수 없이 그냥 집으로 갔다.
손등을 입에 대 보았다.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느낌이 없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맞부딪쳐 보았다. 역시 별 느낌이 없다. 인터넷에 접속해 ‘키스 느낌’을 검색했다. 가장 맨 위에 있는 걸 클릭했다. ---p. 122
교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이영재가 교탁 앞에 서서 종례 시간에 선수를 뽑을 거라고 했다.
“침, 너 나가 봐.”
어느새 교복으로 갈아입은 석준이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우진이는 체육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목이 마르다며 매점으로 뛰어갔다.
“나?”
“응. 너 농구 잘하잖아.”
“글쎄.”
우리 반 남학생이 20명이지만 농구 경기에 나가는 건 다섯 명뿐이다. 우리 반에는 나보다 키가 크고 농구를 잘하는 애들이 많다.
“침, 컴 온 컴 온.”
석준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내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난번 3반이랑 축구 경기 끝나고 여자애들이 민석이한테 호감 보인 거 알지”
석준이는 다른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기억난다. 1:1 상황에서 운동을 잘하는 민석이가 골을 넣어 우리 반이 이겼고 민석이는 그 일로 한동안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남으로 군림했었다.
“이번이 기회라고. 네가 멋진 활약을 보이면 효림이가 너를 안 좋아하겠냐?”
---pp. 179~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