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지독한 바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는 도저히 우리를 가르칠 수 없다며 대놓고 비난했으며 가끔은 자기가 이해시키려 애쓰고 있는 요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 줄 수 없어 절망했다. (…) 지금 회고해 보건대, 결국 비트겐슈타인과 케임브리지 학생들 상호 간의 몰이해가 진짜였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몰이해가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확신했던 것처럼 실제로도 그렇게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것은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논의할 이야기가 실제로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면, 그 타당성이 내포하게 될 한 가지 사실은, 영어권 청자들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접근할 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선입관들로 인해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거의 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당시에 우리는 그를 분열된 인간, 즉 전무후무할 정도의 독창적인 기법을 지닌 천재적인 영어권 철학자로서, 우연찮게 극단적인 도덕적 개인주의와 평등주의에 몸소 천착하게 된 사람 정도로 생각하였다.
--- p.27~28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오스트리아 저명인사들의 목록은 길고도 유별나다. 통계 열역학의 아버지인 루트비히 볼츠만, 작곡가의 형제로 자신 또한 음악적인 재능이 없지 않았던 오토 말러, 독일어권에서는 그 재능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던 음유시인 게오르크 트라클, 『성과 성격』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한 소송 사건에 휘말렸다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에 베토벤이 죽은 집에서 자살한 오토 바이닝거, 자신이 설계한 황실 오페라 하우스에 쏟아진 비판을 견딜 수 없었던 에두아르트 반 데어 뉠,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알프레트 레들, 그리고 더 말할 것도 없이 비트겐슈타인의 형 세 명이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 정체성과 의사소통의 문제는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심지어 국제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빈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다.
--- p.97~98
로스는 여러 친구와 지인들에게 코코슈카를 소개했는데, 그중에는 크라우스와 알텐베르크, 그리고 예술사학자인 한스 티에츠와 에리카 티에츠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코코슈카는 그들을 모델 삼아 여러 차례 그림을 그렸다. 코코슈카가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그의 작품 중 명암이 가장 어두운 것들이었고,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화가는 이 작품들을 자신의 ‘검은’ 그림들이라고 불렀다. (…) 코코슈카는 그들의 얼굴에서 수많은 빈 사람들의 삶이 영적인 진공 상태에 빠져 있음을 분명하게 보았다. 클림트처럼 코코슈카 역시 이런 영적인 요소를 끄집어내고 싶어 했다.
--- p.158~159
우리는 전쟁이 터지기 전에 문화와 윤리에 관해 빈에서 벌어진 논쟁의 주요한 원천들이었던 예술과 도덕의 위기, 그리고 더 나아가 가족생활의 위기에 비트겐슈타인이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증명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증명의 부담은 그와는 반대의 견해를 입증하는 데 있는 셈이다. 즉 그가 성장한 집안 자체가 그러한 문화의 한 구심점이었던 데다, 그러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긴장 관계들을 그 안에 잔뜩 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주변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진행되던 논의들이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도록 막고 싶었다면, 그는 오히려 매우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켰어야만 했으리라는 것이다.
--- p.294~295
이러한 빈적인 맥락에서 볼 때, 『논고』는 20세기 초에 몇십 년간 진행된 빈 식의 사회 비판이 근거를 두고 있던, 이성의 영역과 환상의 영역 간의 차이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 이런 해석에 근거할 때, 『논고』는 예술만이 삶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 인간 삶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예술에 할당하는 특정한 유형의 언어 신비주의의 한 표현이 된다. 오로지 예술만이 도덕적 진리를 표현할 수 있으며, 오로지 예술가만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르칠 수 있다. 예술은 사명이다. 1890년대의 탐미주의자들처럼 형식에만 관심을 쏟는 것은 예술을 곡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처럼, 어디까지나 『논고』 역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