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에 휩싸여 건영이 힘겹게 눈을 떴다. 늘 깨어났던 자신의 침대의 다른 느낌, 거기다 늘 방 안에 풍기던 향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변을 살폈다. 마치 모델 하우스 같은 분위기에 곧 이곳이 호텔임을 알아차린 건영이 눈을 감으려는 찰나, 옆에서 꿈틀대는 뭔가에 놀라 고개를 돌려 황급히 옆을 살폈다.
‘뭐, 뭐야!’
자신의 옆에서 꿈틀대는 미자의 모습을 확인한 건영이 황급히 이불을 들췄다. 그 속에 담긴 자신의 나체를 보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유건영. 침착해. 너 이런 일 많잖아. 침착하게 대처하자. 우선 눈을 뜨고 떳떳하게 샤워부터 하자.’
건영은 무조건 두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 당당하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샤악 물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뜬 미자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이 짓까지 하게 됐는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떨어지던 물소리가 끊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뒤척이던 미자는 문 열리는 소리에 얼른 이불을 뒤집어썼다.
허리에 수건을 둘러매고 나온 건영은 애써 덤덤한 척, 미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일어난 거 아니까, 샤워부터 해.”
사뭇 다른 건영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미자가 천천히 이불속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이불을 온 몸에 칭칭 감은 채로 욕실로 들어갔다. 싸늘하다 못해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건영 때문에 미자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치고 나온 미자가 어색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우선 미안하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실수했네. 보상을 원하면…….”
냉철한 모습으로 이야기 하는 건영 때문에 점점 기분이 상해지고 있는 미자가 건영의 말을 뚝 잘랐다.
“잠깐. 보상이라니? 지금 보상이라고 했어? 아니, 결혼도 안한 남녀가 한방에서 그것도 그, 그 짓을 하고 하루를 같이 보냈는데.”
“그러니까 내가 보상을 해주겠다고.”
“네가 말하는 그 보상은 뭔데?”
“돈을 달라면 줄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는 건영의 소리에 미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들을 주어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윽고 어제 봤던 그 차림으로 나온 미자가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디가?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놔.”
“강미자.”
“내가 돈 없어서 너한테 몸 줬냐? 나쁜 새끼!”
“돈 싫음 다른 걸 이야기해. 보상해준다고!”
“다른 거? 네가 생각하는 다른 건 뭔데?”
“그러니까. 뭐, 연예인을 시켜 달라면.”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연예인 하겠냐?”
“그니까 뭐를 원하냐구!”
“정말 기억 안 나는 거야, 안 나는 척하는 거야?”
“뭔 소리야?”
“내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해줄게. 나랑 살자. 어제 네가 했던 말이야. 그거, 결혼하자는 말 아니었어? 난 그거 때문에 널 받아들인 거라고!”
“뭐, 결혼?”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미자를 보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던 건영 이내 껄껄 웃었다. 그런 건영을 정색하며 바라보는 미자 때문에 웃음을 뚝 그친 건영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거야 술 취해서. 설마, 진짜 그 말 때문이라고?”
“그럼 내가 이 시점에서 거짓말을 하겠어? 할일 없이?”
“못해. 그깟 하룻밤 잔 걸로 결혼? 미친 거야?”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미자는 걸음을 떼어 룸 문을 열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건영이 빠르게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이야기하다 말고 어디가?”
“이거 놔. 지금 여기서 당신하고 이야기 더 했다간 살인날지도 몰라.”
건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미자가 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차마 그녀를 잡지 못한 건영이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건영은 때 맞춰 울리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 너 어디야!
휴대전화 너머로 들리는 다호의 외침에 건영이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답 대신 들려오는 건영의 한숨소리에 다호가 금세 걱정스런 목소리를 내뱉었다.
- 왜, 무슨 일 있어?
“큰일 났다, 형.”
-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또!
“나, 강미자랑 잤어.”
외박까지 하고 아침에서야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 미자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던 순희가 그녀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말만 한 년이 어디서 외박질이야? 어서 뭐 했어!”
“잤어.”
“누구랑?”
“유건영이랑.”
“진짜?”
“아! 미치겠다! 출근도 해야 되는데.”
우유와 토스트를 먹다 말고, 순희는 잔뜩 궁금한 얼굴로 미자 곁에 앉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미자를 일으켜 세워 앉히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미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순희의 눈을 들여다봤다.
“어떡하지?”
“아니, 진짜야? 아는 척 안 하겠다면서 어떻게 유건영을 다시 만나?”
“나 어제부터 일한 곳이 유건영 소속사 사무실이래.”
“웬일이니. 어떻게 너한테만 그런 복이 떨어지냐? 부러운 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여! 어떻게 하냔 말이여!”
“뭘 어떡해? 결혼혀.”
담담하게 토스트를 뜯으며 말하는 순희를 향해 미자가 베개를 획 집어 던졌다. 간신히 베개를 피한 순희가 왜 그러냐는 듯 미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미자가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돈을 주겠다던 남자였다. 결혼 이야기에 기겁했던 남자였다. 그런 사람과 결혼?
“돈 주겄디야.”
땅이 꺼져라 한숨 내쉬며 내뱉는 미자의 말에 순희는 곧 기함할 듯 소리 높였다.
“그게 뭔 소리여?”
“지가 실수를 했으니까, 돈을 주겄디야. 그걸로 땡치랴.”
“뭐 그런 쓰벌놈이. 그걸 가만 뒀어?”
안 가만 두면 어쩌겠나. 때리는 걸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데.
어쩌면 건영의 입장에서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하룻밤 잔 걸로 결혼 말을 하나. 하지만 미자는 다르다. 미자가 살아온 33년 동안 한 번도 집안의 법이 1950년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 말인 즉, 부모님의 시각이 1950년대에 머물러 있으시다는 거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배운 법도라는 게 바로 1950년 식이다. 아버지는 미자 어릴 때부터 그녀를 앉혀놓고 가르쳤었다. 아녀자의 법도에 대해서. 여자도 아니었고, 여인도 아니었다. 아녀자였다. 그 단어를 쓸 때, 우리 아버지의 보수 성향은 바꿀 수 없다는 걸 미자는 알아챘었다.
아녀자는 절대,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했었다. 팔랑거려도 안 되고, 늘 조신하고 예의 발라야 하며, 남편을 섬겨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살아온 미자에게 하룻밤은 건영에게 모든 것을 줬다는 의미도 된 거다. 그런데 그깟 하룻밤이라는 건영의 발언에 미자는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었다. 거기다 왜 자신이 하필 여자로 태어났을까,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지는 표라도 안 나지. 여자는 뭐야, 대체! 아니, 만들려면 좀 평등하게 만들던지.
별 게 다 억울해진 미자가 침대에 고개를 푹 묻었다.
“그거 순 내숭쟁이였네? 지금까지 TV에서는 아주 남자인 척 다하더니.”
“이제 어떡하냐고, 나는!”
“뭘 어떡해. 우선, 출근해. 그리고 그놈 모른 척해.”
“이 마당에 무슨 출근이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