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데미안 페쳇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고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신문에서는 신중을 기해 보도했지만 데미안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 탓이라고 소곤거렸다. 명목상 자살일 따름이었다. 그를 죽인 것은 이라크였다. ---p.36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이 옳은지 그른지 나는 모르네.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는데 대의명분도 없고 갈 길이 아주 먼 것 같기는 하지만. 또 모르지. 나보다 현명한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을지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이라크에서 돌아온 이들이 받아야 할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네. 내 아버지만 해도 그래. 그분은 2차 대전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정작 당신은 그 사실을 몰랐지. 전쟁터에서 자신이 한 일과 보았던 일들 때문에 마음이 망가졌던 거야.---p.41
혼자 내버려두라고 누군가한테 애원했어. 말하지 말아달라고. 아니야, 속삭이지 말아달라고 했어. 그 애는 신경이 곤두서고 공격적이었네. 나한테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달려들곤 했어. 토비아스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면 늘 어딘가에 혼자 있었어.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네. 누군가한테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보라고는 했지만, 내 말대로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네. 그 애가 돌아오고 석 달쯤 뒤부터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2주 뒤에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었지.---p.47
부자들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쥐어짠다. 이 전쟁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었다. 싸움터로 나가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 속에 부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물어보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안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 있을 까닭이 없으니까. 거기엔 그와 비슷한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도 궁색한 삶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한층 더 빈곤한 사람들도 많았다. 가난에 훨씬 익숙한 사람들의 기준에 따르면 그는 오히려 넉넉한 편이었다.---p.88
그곳은 오래된 땅이었다. 병사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라크의 역사를 공부한 다음에야 그는 그곳이 인류 문명의 요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흙집에서 두려움에 떨며 그를 쳐다보는 저 사람들의 선조는 문자와 철학,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이었다. 지금 미군의 탱크와 로켓, 전투기가 지나가는 길은 예전에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몽고인, 알렉산더, 줄리어스 시저, 나폴레옹이 갔던 길이었다. 그곳은 한때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p.184
대답을 하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보다 아들이 먼저 죽는 게 나을까? 어머니의 슬픔은 여전하겠지만 아들의 고통이 끝났기에 조금은 덜 괴롭지 않을까? 아니면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편이, 그래서 남은 평생을 끝까지 아들 곁에서 보내는 게 나을까? 아기였을 때는 이런 삶은 악몽 속에서나 만나는 것이었을 테지만, 나는 첫 번째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그는 방구석에 갇혀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과거가 없는 사람, 남들한테 잊히고 자기 자신의 기억마저 잃어버린 사람이 될 것이다.---p.196
통증이 있어야 마땅하다. 통증이 필요하다. 통증이 있으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인가? 이것이 죽음?---p.239
그들이 귀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죠? 2008년 1월부터 8월까지 자살한 병사 육십 명 중에서 서른아홉 명이 조국에 돌아온 뒤에 목숨을 끊었어요. 우리는 그 사람들의 자살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상처를 입었지만 어떤 경우엔 너무 늦어버린 다음에야 그 상처가 드러나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돼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요.---p.399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들이 나타나 무성한 풀숲 속에서 움직인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와 나란히 석재 벤치에 앉아 있다. 머리 위의 새들이 자장가를 부르고, 남자는 상대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그해 첫 낙엽 사이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 남자가 걸어간다. 여기, 병사들이 모여 전쟁에 관해, 자신들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 죽은 자가 증인이 되어 증언한다. 밤공기가 위로의 속삭임을 실어 나른다.
아내와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립탐정 찰리 파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의 눈앞에 초자연적인 악이 실체를 드러낸다. 이라크전쟁 참전 군인들의 연쇄 자살 사건을 파헤치던 파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궤의 비밀에 다가서게 되는데…… 탐욕에서 촉발된 악의, 인간의 의식 속으로 파고든 고대의 악령이 그를 덮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