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중세영국의 역사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William)의 침입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었다. 5세기 중엽, 영국에 거주하던 켈트인들(Celts)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유럽대륙에서 영국으로 들어온 앵글로색슨(Anglo- Saxon)족은 켈트인들을 무찌르고 왕국을 세웠다. 이로서 영국은 앵글로색슨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들이 사용한 게르만적 색체가 강한 언어가 오늘날 영어의 조상, 즉 고대영어(449~1100)였다. 앨프레드(Alfred, 871~ 899 재위) 대왕의 혈통을 물려받은 앵글로색슨 왕조의 마지막왕은 참회자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1042~1066)였다. 그는 후사 없이 사망함으로써 영국을 격동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장에서는 11세기 중엽 윌리엄의 정복으로 시작된 프랑스계 왕조에서부터 15세기 튜더왕조의 설립까지 영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살펴본다.
1. 초기 중세 시대(1066~1300)
(1) 노르만 정복
참회자 에드워드는 앵글로색슨 혈통의 애설레드(Æthelred the Unready) 국왕과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엠마(Emma of Normandy)와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영국이 덴마크 왕조의 치하에 있던 시절, 어머니의 고향 노르망디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덴마크 왕조의 혈통이 끊기게 되면서, 영국인들은 과거 웨식스(Wessex) 왕조의 부활을 원하였고, 에드워드는 37세가 되어서야 영국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정치에 무능하여, 그의 치세 동안에 웨식스 백작 고드윈(Godwin)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경건한 신앙심으로 인해 영국 왕실의 최고 성자로 불린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 에디스(Edith)와 결혼하였으나 후사를 갖지 못하였다. 결국 에드워드는 임종하면서 고드윈의 아들 해롤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한편,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y) 공국에는 윌리엄이 어린 나이에 공작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Robert I)와 평민 출신의 첩 사이에 태어났다. 부친인 로베르가 1035년 예루살렘 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사망한 후, 윌리엄은 늘 반대 세력들의 위협을 받으며 자랐다. 이러한 난관은 그를 냉정하며 이성적이며 전제 군주적 성격을 지니게 만들었다. 1042년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직접 노르망디를 다스리게 되었다. 윌리엄이 영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종숙(從叔) 에드워드가 노르망디에 머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에드워드가 윌리엄에게 왕위를 약속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혹은 윌리엄에게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르망디 측에서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가 죽자, 현인회의는 고드윈의 아들 해롤드(Harold II, 1066 재위)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윌리엄은 왕위계승의 부당성을 선포하며 침공을 계획하였다. 해롤드도 노르망디가 영국을 침공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1066년 9월 8일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의 부대가 영국 북쪽의 노섬브리아(Northumbria) 지역을 침공했다. 이에 해롤드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해야만 했고, 9월 25일 요크 근처 스탬퍼드 브릿지(Stamford Bridge)에서 노르웨이군에 승리하였다.
마침내 9월 28일 윌리엄이 침공을 감행하여 서섹스 동쪽연안 페번시(Pevensey)에 상륙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해롤드의 부대는 윌리엄과 대적하기 위해 400km나 되는 길을 빠르게 남진해야만 했다. 이미 노르웨이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많이 지쳐 있던 해롤드의 부대는 10월 14일 헤이스팅즈(Hastings) 근처에서 노르만(Norman) 군대와 만나게 되었다. 9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해롤드가 지금의 배틀 수도원 (Battle Abbey)이 세워진 곳에서 살해당함으로서 영국군은 급격히 무너졌다(김혜리2011: 37). 프랑스에 있는 바이외 벽걸이(Bayeux Tapestry)에는 지금까지 기술한 일련의 역사적 장면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헤이스팅즈 전투에서 승리한 윌리엄은 런던으로 진군하면서 영국 귀족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은 영국의 윌리엄 1세(노르망디의 윌리엄 2세)로 즉위하였다.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로 인해 영국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막을 내리고 프랑스계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2) 노르만 왕조
1) 윌리엄 1세(1066~1087)
헤이스팅즈에서의 승리와 런던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윌리엄(William I)이 영국 전역에서 왕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부터 1070년까지 서쪽과 북쪽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으며, 1071년이 되어서야 통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해롤드를 추종하던 많은 고대 영국 귀족이 제거되었고 그들의 재산이 몰수되었다. 윌리엄에게 충성을 바친 영국인은 원칙적으로 노르만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으나, 실제로는 왕국의 중요요직과 재산은 모두 노르만 귀족과 외국인들에게도 돌아갔다. 1072년에 영국의 12명의 공작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영국인이었으며, 그마저도 4년 후에 처형되었다. 그의 치세 말기에 왕국의 토지 소유에 대해 조사한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1086년)이 편찬되었는데, 이 토지대장을 보면, 왕국의 귀족 가운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토착 색슨인 귀족은 단지 두 명만이 남아있었다. 새로운 지주는 일부 브르타뉴(Brittany)와 플랑드르(Flanders) 출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노르만인이었다(모건 1997: 135). 뿐만 아니라 교회의 요직도 노르만인들이 차지하였다. 1075년 21명의 대수도원장 가운데 13명이 영국인이었으나, 12년 후에는 3명으로 줄었고, 나머지는 외국인들로 채워졌다. 윌리엄의 치세말기, 색슨인 주교는 울프스탄(Wulfstan, Bishop of Worcester)이 유일하였다(Baugh and Cable 1993: 110).
윌리엄은 영국을 다스리기 위해 대륙의 봉건제도를 도입하였다. 자신의 노르만 측근들에게 성곽과 영토를 제공하여, 이들이 토착 영국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윌리엄은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한 프랑스의 공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정치에 직간접적 간섭을 받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통치 말기까지 대륙에서의 전쟁과 외교에 쏠려 있었고, 반드시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생의 마지막까지 노르망디에 머물렀다. 노르망디는 영국보다 더 공격을 받을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영국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랜프랑크(Lanfranc, 1005~1089)가 다스리게 했다. 그는 왕을 도와 영국 교회를 교황의 간섭에서 독립시키려고 노력하였고, 성직자들이 왕의 자문 이상이 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한 토착 영국인들이 차지하던 관직을 노르만인들로 대체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1087년 윌리엄은 프랑스 왕 필립으로부터 망뜨(Mantes)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윌리엄의 큰아들 로베르 2세(Robert II of Normandy)는 한때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가 부상을 입었을 때, 프랑스 왕의 궁정에 있었다. 윌리엄의 병석을 지키는 이는 그의 동생 윌리엄 루퍼스과 헨리였다. 윌리엄은 임종하면서 루퍼스에게 영국을 물려주었다. 반란에도 불구하고 큰아들에게는 노르망디와 메인(Maine)을 상속하였고, 헨리에게는 영지를 사들일 수 있는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본문 중에서